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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쟝쟝 Sep 11. 2021

구원은 구원하지 않는다

윌리엄 스타이런, 소피의 선택

‘학습된 무기력’이라는 말이 있다.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어 자신이 극복할 수 있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자포자기하는 것을 말한다. 소설 주인공 소피를 생각하면 ‘학습된 무기력(혹은 무력감)’이 떠오른다. 선택지 같지도 않은 선택을 해야 하거나 자명한 생존의 선택 앞에 죄짓는 선택을 해야 하거나. 삶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잃는 경험들의 반복은 그녀에게 지독한 죄책감과 학습된 무기력을 심어주었다. 


고통은 그 자체로 악은 아닐 거다. 다만 고통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동안 고통만이 문제가 된다는 점에서 나쁘다. 고통을 방어하는 동안 다른 가능성이 소거된다. 더 좋은 선택지를 보지 못하고 가까이 있는 당장의 고통을 약화시켜줄 선택들을 한다. 분명 어디까지는 그것이 삶을 구원한다. 그러나 어딘가부터는 삶을 옥죄기도 한다. 그 적절한 어디는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아니, 어느 수준까지 망가져야 회복이 가능한 거지? 상처가 너무 깊어 그것을 방어하는 데 온 삶을 다 써야 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사실 그런 삶은 도처에 있다. 


잘 알려진 대로 이 책은 아우슈비츠를 다루고 있다. 소설을 읽고 난 후 나는 상처 이후의 삶을 재건하는 방법에 대해 묻는다. 인간의 무력감에 대해, 의존심리에 대해, 구원에 대해 생각한다. 


‘무기력-무력감’은 한때 많이 생각했던 주제다. 사춘기 이후부터 종종 방문했던 우울증의 징후는 언제나 경미한 무기력을 시작 지점으로 찾아왔다. 점점 일상을 돌보는 것이 소홀해지다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든 그 시간이 시작되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삶 자체가 되었다. 나는 종종 지옥이 있다면 한증막 같은 곳 일거라 지금도 생각하는 데(덥고 습한 것을 정말 싫어한다) 내 우울은 그런 모습이다. 매우 후덥지근하고 끈적끈적하고 시야를 가리는 뿌연 습기로 가득 차 있는 공간에 나는 누워있고, 몸을 일으켜서 뭔가를 해야 한다고는 생각하는 데, 누워서 숨 쉬고 있는 상황조차 너무 버거운. 무거운 공기. 축축한 공기. 더운 공기.


그 무기력의 근본 원인까지는 모른다. 어떤 선택이나 성장하고 싶다는 욕구 앞에 빈번히 조건과 현실을 이유로 거부당했던 경험들이 떠오른다. 지지나 격려가 없는 상태에서 보란 듯 다른 선택을 할 수는 없었다. 내면에 내 선택이나 욕구를 믿을 수 있는 힘 자체가 없었던 것 같다. 학습된 무기력. 자포자기.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무력감이 무기력을 불러왔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으니 어차피 내 삶이 아니었다. 어떤 의미에서 내 자유의지로 해볼 만한 선택은 나를 망치는 것들이었다. 여러 소설에 등장하는 —빤히 보이는 불행을 선택하는 주인공들— 그 이상한 심리적 역동을 이해한다. 그들과 다른 점은 다만 아주 대놓고 신나게 보란 듯이 스스로를 망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마 제대로 망치는 것 역시 에너지를 (그게 분노 에너지라도) 요구했기 때문이리라. 


어쨌든 적당히 망쳐지고 적당히 수습된 나는 아주 간장 종지만 한 에너지 그릇을 수시로 비우고 채우면서 지내고 있다. 당신은 우울증을 극복했나요?라고 누가 묻는다면. 어느 정도는.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울증이 찾아오기 전의 증상을 알아차릴 수 있다. 내 삶을 내가 통제하고 있지 못할 때, 곧바로 무기력이 신호를 보내온다. 읽거나 먹거나 움직이기 싫다. 예전에는 난 왜 이렇게 게으를까 실의에 빠졌는데 요즘은 내 무기력이 고맙다. 지금 내가 하기 싫은 것을 하는 중이구나, 알아서 척! 알려준달까. 싫은 것도 해야 하는 것이라면 꾹 참고 잘하기 대장이라서 좋고 싫음을 잘 구분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무기력 증상이 나타나는 것을 기준으로 싫은 것을 골라낸다. 그리고 왜 싫은지 생각해본다. 전체인지 부분인지 부분이면 어디까지인지 잘 골라내서 싫은 건 되도록 피한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들을 구체적으로 나눠보고 현실적인 방법을 글로 써본다. 만약 우울증이 다시 찾아온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 한증막의 기분을 느낀지는 꽤 오래되었다. 그토록 무겁게만 느껴지던 삶 자체가 살아볼 만한 것으로 여겨진다. 


“(167) 그녀는 자신이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음식을 먹기 직전의 그 신나는 순간, 그녀의 콧구멍이 피클의 짠 냄새와, 겨자 냄새, 그리고 레비스의 유대식 호밀빵에서 나는 캐러웨이 향을 받아들이는 그 순간, 배에서 육감적인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것만 보더라도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고 호숫가에 배를 깔고 누워서 안도감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우슈비츠에서 겨우 살아남은 폴란드 여성 소피는 미국으로 이주해 음악과 음식의 도움을 받아 조금씩 살아있음의 감각을 회복한다. 그러던 어느 날 대도시의 지하철에서 성적 침범을 당하게 되고(이 장면 역했다) 애써 그러모은 생의 의지를 순식간에 상실한다. 


그녀가 우울증을 겪고 있는 모습은 과거의 나를 떠올리게 했다. 그때의 나는 누군가가 구원해주길 원했던가. 글쎄. 도저히 그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구멍이 보이지 않았던 것은 기억한다. 내 앞에 놓인 어떤 삶도 살고 싶지가 않았었다. 누군가 그 삶에서 꺼내 준다면 기꺼이 였을 것이다. 일단 거기서 빠져나와야 하니까. 


죽은 듯 살던 소피에게 영화처럼 동화처럼 짠 네이선이 나타난다. 죽을 것 같은 그녀에게 죽지 않을 거라고 말해주고, 부족한 영양상태와 건강을 돌봐준다. 나는 안도했다. 소피만큼이야 했겠냐만은, 곧 죽을 것만 같은 그녀에게 나타난 네이선이  고마웠다. (그가 스팅고에게 200달러 주는 것도 고마웠다. 나란 인간. 친절에 취약해ㅋㅋ)


“(248) 그가 곁에 있다는 사실에 새삼 안도감을 느낀 그녀는 다시 피곤에 겨운 졸음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지만 메스꺼움과 으슬으슬한 기운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를 사랑하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당연하지!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다만 너무 편하다고 대답했다. 이상하게 그 사람이랑 같이 있으면 잠이 와. 항상 불안했는 데, 안전하고 보호받는 기분이 드는 것 같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어. 사랑이 막 설레고 가슴 터질 것 같고 그런 건 아닌 듯. 이것은 나의 진술. 그 옆에서는 항상 졸렸다. 사는 게 치열했는 데 함께 있으면 무풍지대 같았다. 이해하고 이해받고 그런 건, 공감하고 공감 못하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나 몰라라 의탁해버리고 싶은 기분. 그러고 다 너 때문이야! 탓해도 그는 기꺼이 자신 때문이라고 할 사람이었다. 그때의 나는 그런 의존이 필요했다. 내가 안전함에만 머무르지 않으려는 순간부터 관계가 으깨졌지만. 어쩌면 그 의존의 경험이 꼭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라고 지금은 생각한다. 


사실 그전까지는 의존하는 방법을 잘 몰랐다. 힘들다고 말하는 게 굴욕인 것 같고 그랬다. 생애 대부분 누군가들을 계속 보호하는 역할을 떠맡고 원치 않는지도 모른 채 반복했었다. 의존의 이면, 혹은 건강한 의존에 대해서 예전엔 정말 많이 생각했었다. 모두의 성격이 다 다른 것처럼 사람마다 맞는 의존의 방식이 있는 것 같다. 연애할 때의 나는 건강한 의존 상태가 무엇인가에 대해 정말 많이 고민했으나, 요즘 나의 화두는 의존하지 않고 —혹은 적당한 의존을 분배/관리하며— 살아가는 방법인 걸 보면, 성격만큼 시기도 타는 것이 ‘의존’인 듯. 


“(2권 - 184) 어젯밤에 말이에요. 어젯밤에 스팅고, 당신에게 코네티컷에서 있은 일을 얘기해 주고 난 다음에 말이에요, 처음으로 깨달은 게 있어요. 네이선이 그런 식으로 나를 떠난 것을 내가 기뻐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정말로요. 정말로 기뻐하고 있다고요. 그동안 나는 전적으로 그에게 의존했어요. 하지만 그건 바람직한 일이 아니죠. 그가 없이는 움직일 수도 없었어요. 아주 작은 일을 결정할 때조차 먼저 네이선을 떠올렸어요. 아, 알아요, 그에게 엄청난 빚을 졌다는 거. 그가 내게 얼마나 많은 것을 해 주었는지도요. *다 알아요. 하지만 그의 귀여움을 받는 새끼 고양이처럼 사는 것은 싫어요. 귀여움 받고 섹스하는 대상이 되는 것은*…….”


너무도 아슬아슬하고 취약한 상태에 있던 소피를 네이선은 말 그대로 구원하고 둘은 연인이 된다. 수시로 기분이 바뀌는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의 네이선이지만 소피는 그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애착을 느낀다. 소설의 2권에서 네이선이 소피에게 대해 자아가 없는 것 같다고 언급하는 부분이 있다. 나는 그 부분이 정말 역했다. 소설 주인공 스팅고를 포함해 모든 남자들이 그녀를 욕망하는 까닭이 탁월한 미모에만 있지는 않았다는 확신이 드는 장면이었다. 


그들은 원한다. 아름답고 자아가 없는 그녀를. 방점은 ‘자아가 없다’는 데에 있다. 아우슈비츠에서의 학습된 무기력으로 삶에 대한 통제 감각을 잃어버린 아름다운 소피는 네이선의 통제를 기꺼워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사실 소설의 많은 부분에서 오럴 섹스를 포함한 폭력적인 섹스 장면들이 등장하는데, 그걸 20세기 최고의 섹스라고 말하는 네이선에게 진짜 치가 떨렸다. (이건 작가 윌리엄 스타이런 본인의 섹스 판타지이자 욕망이라는 혐의를 지울 수가 없는 부분이기도 함)


나는 네이선의 말대로 그녀가 자아가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전쟁과 아우슈비츠를 겪으면서 망가진 복구 불가능한 자아를 누군가에게 의탁이라도 해서 살아야 했던 생존 의지를 차라리 느낀다. 원래 간절하고 절박하고 허기진 인간이란 휘둘리기 쉬운 존재다. 휘두르고 싶은 자들은 휘둘리기 쉬운 연약한 존재를 알아보는 법, 네이선이나 스팅고나 여타의 다른 등장인물들이 소피를 사랑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름다운 여성에 대한 지배욕이고 통제 욕 딱 그 정도의 수준이고 그래서 소설의 ‘나-스팅고’도 싫었다.) 사회나 공동체가 해야 하는 몫이 있다면 인간이 쉽게 휘둘리지 않도록 간절하지 않게 절박하지 않게 허기지지 않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겠지만 20세기는 특별히 더, 그렇지 못했다.


쓰다 보니 연약한 자아에 대해서 자꾸 적게 되는데 내가 읽은 소설의 포인트는 선택권의 박탈(소피의 선택에는 선택하지 않을 권리는 없다)에 따른 ‘학습된 무력감’에 있되 자아의 취약함에 있지는 않다. 무력감과 공포에 많이 노출된 사람이 얼마나 쉽게 구원자에 자아를 의탁하는지 그것이 비합리적인 요구라도 받아들이는 지를 소설 <소피의 선택>이 잘 드러내 준 다고 생각했다. (경험적으로도 알고 있고.)


“(422) 강제 수용소는 대량 학살장으로서의 역할만을 했을 때 인간의 미래에 끼쳤을 위협보다 훨씬 더 크고 영속적인 위협이 되었다. 대량 학살을 위한 수용소는 시체만을 만들어 내겠지만, 완전한 지배의 사회는 살아 있지만 죽은 자들의 세상을 만들어 낸다…….”


밥 먹으면서 넷플릭스 다큐를 즐겨보는 편인데 최근에 30분짜리 <폭군이 되는 법>이라는 다큐가 올라왔다. (아마 <독재가가 되는 법>이라는 책과 관련이 있는 듯) 재밌다. 추천한다. 1편은 히틀러가 권력을 잡는 내용인데, <소피의 선택>을 읽은 후에 봐서 더 흥미로웠다. 1920년대의 독일 사람들이 우리보다 어딘가 모자라서 나치에 휩쓸린 것은 아니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독일의 대중들이 시달렸던 것도 무력감이었으며, 자아를 의탁할 구원자를 찾았던 것 같다. 소피에게 네이선이야 말로 가장 치명적인 구원 자였듯 독일의 국민들에게 히틀러도 치명적인 구원자였다. 


당연히 구원은 구원하지 않았다. 




얼마 전 친애하는 친구가 본인은 무척 구원 서사를 좋아하지 않는다며 일침을 놓았다. 나는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구원 서사는 좋아하지 않지만 쌍방 구원 서사는 아주 환장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난 뒤 그것이 쌍방 구원 서사라 할지라도 - 결국 구원은 구원이니 구원물을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하면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 독후감이 그 과정의 일환이다.) 내가 취약했던 (젊은) 시절에, 취약한 나를 알아보고 사로잡은 인물과 관계들이 있었는 데, 그런데 어쨌든 달콤했던 그 관계들은 결론적으로는 치명적인 상처들로 남았고,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혼자가 되어 돌이켜보니, 그때 그 관계들 참 별로다 하면서도 당시의 나에게는 구원이 맞았어서, 나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지. 아 그랬네. 그런데. 구원. 어쨌든 어디까지는 좋았는 데, 어느 순간부터는 왜 그렇게까지 나 자신을 잃어버렸던 건가 하고 생각하게 되는 지점들이 있다. 지금도.


스스로에게 내려보는 결론은 나는 아직까지도(!) 구원물을 좋아한다는 거다. 차라랑 샤라랑 신이 임재하는 그런 구원 말고, 상처가 상처를 알아보면서 함께 우당탕탕 성장하는 이야기. 상처가 치유된다기보다는 자기 상처에 심드렁해지고 그렇게 그냥 한 명의 사람이 되는, 일상을 되찾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그 역시 이야기라는 장르가 가져다주는 일종의 신화일까? 현실에서 그런 시도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 걸까? 잘 풀리면 소설 <노멀 피플>이 되겠지만 언제나 안 풀리면 소피와 네이선이 되는 걸까. 아, 그건 싫은 데. 어디에 배팅해야 하나. 차라리 인생에서 구원 서사라는 장르 자체를 지우는 게 좋을지도…? <노멀 피플>이나 <빌어먹을 세상 따위>를 좋아하는 나의 이 취향은 부족하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그런 마음의 반영인 걸까. 내 개인에게 아직 남아있는 건강하지 못한 의존증/무력감의 증거인 걸까. 



글의 마무리. 지난 세기에 구원 서사가 대중들에게 소구 하는 힘이 있었고, 특히 그게 백마 탄 왕자님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그건 여성들의 처지에 기반한 집단 무의식의 반영이었지 싶다. 지금 미디어 서사들의 주축은 여자가 여자를 돕는 이야기라는 생각이고 그것은 고무적이다. (다크 페이트와 퀸즈 갬빗, 블랙위도우를 보라. 벌써 pc 묻었다고 광광대는 자들의 아우성이 들린다.) 


구원을 바라는 인간 심리 이면에는 현실에 대한 진한 무력감이 작용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글을 참 길게도 썼다. 그러므로 나의 이 구원 서사에 대한 욕구(?)는 학습된 무력감일지도 모른다. 구하긴 누굴 구해. 상처를 누가 알아봐. 그냥 내가 나를 구하고, 내 상처는 내가 빨간약 바르고 호호하믄 되지. 실은 그것도 성공적 구원만큼이나 차마 어렵다. 누가 누군가를 구할 수 없다면, 그것이야 말로 환상이라면,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을까. 스스로 강해질 수 있을까. 스스로 강해지면서도 남을 덜 해칠 수 있을까.

 

[스포일러 주의하며 덧붙이는 글들.]


1. 1권에서 스팅고 총각 떼는 날이 소설 끝나는 날이 될 거라는 내 예감은 적중했다. 450페이지 이상의 2권으로 된 소설에서 대충 850페이지를 읽고 있는데도 가련하게도 그의 슐롱(소피의 표현ㅋㅋㅋ)은 “눈처럼 순결(스팅고의 표현)”했다. 700페이지쯤에 가서 스팅고는 이럴 바엔 차라리 동성애를 하겠다고 한다. 그즈음 해서 결국엔 나마저 그의 고추를 불쌍해하는 지경이 되었고, (약간의 자아 분열을 느끼며) 스타이런 이 변태 새끼라고 욕했다.

 

2. 영화는 1982년 작이었고 듣던 대로 수작이었다. 메릴 스트립은 정말 소피만큼 아름다웠다. 추천해 주신 구스 맥주와 함께했다. 탕수육도. 나는 찍먹과 부먹의 이분법을 경계한다. 이날은 그냥 부었다. 사진에서 표현 안됐는 데, 녹색의 눈을 가진 메릴 스트립은 진짜, 너무, 아름다웠고 연기도 잘했다. 그리고 소설 속 핑크 하숙집은 저렇게 표현되었다. 신기했다.  


3. 소설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겨우 수용소에서 겨우 살아 나온 소피가 음식을 사 가지고 와 공원의 구석에서 음미하며 아주 천천히 조금씩 먹는 장면이다. 영화에서 나오지 않아 아쉬웠다. 그 장면을 떠올리면 소피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도 충분히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 구원은 구원하지 않는다. 


2021-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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