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원, 시와 산책
지금의 내 모습을 과거의 나들은 단 한 번도 그려보지 않았다는 게 인생이 드러내 보이는 진실일지도 모르겠다고.
‘산책’을 백수 루틴에 집어넣은 것은 5월부터이다. 매일 하기로 마음먹었던 달리기를 무릎이 견뎌내지 못해 처방한 임시방편이다. 얼마 전 읽은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책을 읽으며 걸어본다. 걸어 다니면서 책 읽기란 중학교 때 딱 한 번 해보고 말았던 일이다.
실은 책이 아니라 만화책이었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띵작 몬스터. 다음 장면이 너무 궁금해 미치겠어서 만화방에서 공수해오자 마자 펼쳐 읽으면서 집까지 걸어왔던 기억. 계절이 이즈음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책장이 쏟아지는 햇빛을 반사하는 덕에 다음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눈 앞에 잔상이 생겼다. 아랑곳하지 않고 다음 페이지를 넘겨 읽다가 그늘진 집에 들어오니 맙소사 눈앞이 캄캄해지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꽤 오래 시력이 돌아오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설마? 나 이대로 앞이 안 보이는 거??? 걱정보다는 만화 속 닥터 덴마의 현재 상황이 어떤지를 더 걱정했던 흑빛역사가 있다.
그날 쨍한 햇살 아래에서 책 읽는 행위란 자칫 눈을 멀게 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은 후 걸으면서 종이에 쓰인 무언가를 읽어본 적은 없다. 그 흔한 수첩에 영단어 써서 외우기조차도 ㅋㅋㅋ (이건 그냥 공부를 안 한 거 아닐까?)
“(11) 나는 홀린 듯 집을 나선다.”
문장에 눈이 멈췄다. 산책하면서 핸드폰 보기보다는 산책하면서 책 읽기도 괜찮을 것 같은데? 홀린 듯 책을 챙겨 산책 독서를 도전해보기로 했다. 재밌어 중간에 못 끊어 눈이 멀면 안 되니까 소설 대신 에세이를, 읽다가 넘어질 수 있으므로 고르고 평평한 땅바닥이 있는 산책 코스를, 너무 밝거나 어둡지 않은 적당한 조도의 햇빛이 드는 시간대를 찾았고, 주목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이 없는 한적한 장소가 보이자 책을 펼쳤다.
짧지 않은 인생에 책을 읽으면서 걷는 경험은 단 두 번. 공교롭게도 두 번의 독서에 간택받은 책 모두 훌륭한 책들이었다. 몬스터야 내가 말 안 해도 누구나 다 알 것이고, 이 책 ‘시와 산책’은 아아- 이 연사 큰소리로 외칩니다! 여러분. 읽으세요. 읽어주세요. 제발 흑흑. 저 아껴가며 읽었는 데, 최소 다섯 번 코끝 찡해짐. 오늘 영업 독후감 쓰려고 다시 읽다가 같은 대목에서 계속 더 찡해지기만 함.
“(18) 말도 사람도 진작에 사라졌지만, 그들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소리가 남은 것. 눈을 감고 그 장면을 상상하면 울컥할 만큼 좋았다. 누군가는 실없는 이야기로 치부할 테지만, 나는 삶에 환상의 몫이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대면하려는 삶에서도 내밀한 상상을 간직하는 일은 필요하다. 상상은 도망이 아니라, 믿음을 넓히는 일이다.”
꽁꽁 언 강을 배경으로 한 시인이 눈을 감고 생각하다 이내 울컥해하는 장면을 나 역시 눈 감고 상상해 보다가 함께 울컥한다. 삶에 환상의 몫이 있을까. 있었으면 싶지만, 그건 고스란한 문장으로 읽기에 예쁜 말. 누군가의 삶에는 켜켜이 들어차 있기를 바라지만 나 자신의 삶에는 허용하기 어려웠던 어떤 것. 소설 읽는 것조차 어려워하는 내게 공상은 가성비가 떨어지는 일이며, 환상은 퍼뜩 내 나이를 떠올리게 되는 쑥스러운 일이라고 내심 그렇게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기본소득과 관련한 책을 읽다가 ‘백일몽(데이드림)’을 검색한 적이 있다. 어릴 때나 하는 공상 정도로만 생각했었는 데, 책에서 나오는 백일몽은 좀 더 심각(?)했고, 더 찾아 읽어보니 꽤 보편적인 현상 같았다. 정말로 백일몽을 꾸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지, 신기했다. 사실 그 무렵엔 백일몽은커녕 꿈속에서도 일을 했다. 나는 보통 현실의 연장선인 꿈을 꾼다. 일이 잘 안 풀려 스트레스받고 있으면 더 그렇다. 나도 그러기 싫은데 꿈을 내 맘대로 꿀 수는 없으니까 어쨌든. 퍽퍽한 현실을 꿈속에서 마저 살고 있는 나에게 백일몽이란 사전을 뒤져가며 찾아야 할 만큼 ‘없는 현상’이었다.
공상, 환상, 상상이라니. 인생에 그런 게 끼어들 틈이 있다고?
문제-해결-문제-해결-문제-해결. 그렇게 살았던 것 같다. 꽤 오랫동안.
조금 더 써볼까. 상담 선생님이 의식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 보길 주문했던 적이 있다. 그때의 감정이 본인의 베이스 감정인 경우가 많다고. 먼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었고, 그 순간에도 해야 할 일을 계속 생각했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상태의 내가 너무 불안했다. 아, 이게 바로 나구나. 선생님 아무것도 안 할 때 저는 아무것도 안 하기를 끝내고 난 후에 할 일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러고 보면 상담 샘이 이런 말도 몇 번 했다. “상담 모범생이세요. 숙제처럼 자기 분석을 해오시네요.” 그때는 칭찬이라고 생각했는 데, 좀 더 편하게 와도 된다는 의미였을까나.
한참 요가 수련에 열심일 때, 맨 마지막 사바아사나 타임 대부분은 돌아가서 할 일들을 생각하며 괴로워했다. 으으, 사바아사나를 해야 하는 데, 또 할 일을 생각하고 있네, 나여 어서 사바아사나를 하란 말이다!! 하지만 집에 가는 길에는 어디를 들러서 뭘 사 가지고…(최소한의 동선을 위한 두뇌 풀가동)… 그런 내가 좀 징그럽고 싫었으나 달리 방도는 없었다.
지금의 ―실업급여 수급 중인 백수상태로 ‘넘치는 시간과 오롯이 혼자로 지낼 수 있는 공간’이라는 환경 속에서의― 나는 조금 달라진 것 같다. 백수 초반에 일(혹은 먹고 살)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엄청나게 불안이 몰려오고 안절부절못했다. 어차피 죽을 때까지 불안하게 살텐데, 딱 백일만 참고 불안해하지 말아 보자!!
일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한 달을 수련(?)했고 두 달이 지나자 겨우 적응이 되었다. 불안은 습관이다. 재밌는 사실은 불안이 조절되는 것과 동시에 내가 담배를 피우지 않고 있다는 거다. (그 밖의 몇 가지 요인도 더 있지만) 주로 불안할 때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는 것과 엄청나게 불안한 상황에서 처음 담배를 시작했다는 사실도 이제 와서 깨닫는다. (유레카! 담배를 끊는 게 아니라 담배를 떠올리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게 중요한 거였어….)
“백수가 되면 좋은 점도 있어요. 평소라면 사는 게 바빠 생각 안 해본 것들을 곰곰이 따져서 생각해 볼 수도 있으니까. 이때다 하고 생각 안 해본 것들 생각해봐요.”라고 백수 만렙 친구가 일러 주었다. 역시 베테랑은 달라!! 바로 적용해보겠습니다요.
나 자신에게 솔직하게 물어보는 것은 제법 훈련 되어있는 편이다. 사실 어떤 질문들은 언젠가는 던져보려 아껴만 놓았었다. 이 때다 하고 의식적으로 미뤄왔던 어려운 질문들을 던진다. 아주아주 심각하게. 보통은 제대로 느껴볼 새가 없었던 감정들이다. 아, 내가 당했던 그것은 기만이었어.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은 경멸이었던 걸까. 수치감을 느낄 때 내 얼굴 근육은 이렇게 반응하는구나. 그런데 아, 안돼. 이 생각은 아직은 아픈 것 같아. 파고 들지 말자.
질문이 자꾸 후회와 자책으로 흐를 때면 뇌과학 책을 읽는다.
뇌의 상승곡선을 부여잡아야 해… 산책을 나가자… 햇빛을 쬐자… 세로토닌이여….
그리고 공상.
해야 할 일을 부러 다 없애버리고, 읽어야 할 책도 저리 밀어둬 버리고, 공기처럼 호흡하던 불안과 걱정들을 꾹꾹 눌러 잠가버린 나의 하염없는 시간들 틈으로 생소한 외로움이 그리고 공상이 들어찬다. 가만 생소하다고 썼나? 이 외로움은 대학교 2학년 때, 이 공상의 시간은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각각 겪어본 적이 있었다(는 것을 부러 기억해낼 수도 있을 만큼 시간이 많다).
어쩌면 그리웠을지도. 나에게도 드디어, 드디어 공상의 시기가 찾아왔는 데(백수생활 80일 만에 이룬 쾌거)!! 맙소사 공상하는 나를 부끄러워하는 또 다른 내가 있었다. 세상에.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고, 그 나들은 너무 피곤한 유형의 타입이라 별로군(절레절레)….
그러니까 “삶에 환상의 몫이 있다”는 말이 “상상은 믿음을 넓히는 일”이라는 문장이 때맞춰 정확히 제 시각에 당도했다. 행운이다. (초등학교 2학년 이후로 공상을 하지는 않았다는 인식 뒤에는 그 이후로는 어른스러워지려 애썼던 내가 있는 것도 같다. 이런저런 공상들로 자주 넘어지고 길을 잃던 시절의 내가 좀 더 길었다면 좋았을 텐데.) 오랜 기간 할당하지 않은 그 몫을 할당하면, 현실에 도움되지 않는다며 내쳐온 상상들이 앞으로의 나를 지탱할 믿음으로 바뀌기도 하는 걸까.
그때는 조금 덜 불안하고, 덜 피곤한, 성마르지 않은, 느긋하고 풍부한 사람이 될 수 있으려나.
아무 일 없이 혼자 보내는 하루는 상상력 없는 인간에게 공상의 시간을 열어줄 만큼 길고, 비로소 혼자가 된 이의 공상의 주제는 대체로 ‘혼자’ 일 때가 많다. 아래의 문장들을 읽으며 넉넉하지 않은 채로 혼자 늙어갈지라도 이런 식의 곁을 내어줄 수 있다면 근사한 삶이야, 나는 찬성!! 마음이 조금 긍정적으로 되었다.
“(55~56) 나와 아저씨들은 끝까지 서로의 신상에 관해서는 몰랐지만, 아랑곳 않고 곁을 내주었다. 집 앞 담벼락과 트럭 밑처럼, 거기 둥근 밥그릇처럼, 질박한 공간을 당당히 차지하도록 허락했다. 우리는 구석에서 사는 사람들이었다. 구석의 목소리는 곧 꺼질 불씨처럼 위태로워서, 구석끼리 자꾸 말을 시켜 되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연민이 아니라, 서로에게 원하는 것이 있어 바치는 아부가 아니라, 나에게도 있고 타인에게도 있는 외로움을 가능성을 보살피려는 마음이 있어 우리는 작은 원을 그렸다. (...) 그러니 성별도 세대도 달랐지만, 소극적으로 사귀었고 말없이 헤어졌지만, 나는 이것이 우정이 아니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거나, 인생을 계획하고 살아가는 타입은 아니지만 10대 때도 20대 때도 30대 초반까지도 서른다섯 살의 내가 혼자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피식 웃게 되는 지점은 혼자인 상태를 그 어느 때보다 안녕하다고 느낀다는 것과 그리하여 어떻게 이 안녕을 건강히 오래 유지할 수 있을까를 궁리한다는 것(악착같이 영양제를 챙겨 먹으며 안 하던 운동을 합니다…).
몇 년 전의 내가 막연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삶을 내가 지금 살아가는 것처럼, 또 미래의 나는 현재 상상력의 범위 바깥 어딘가에서 분투하고 있을 테지만. 자주자주 지금의 이 상태로 나이 들어감에 대해 생각한다. 지금이면 충분한 데… 지금 같을 수는 없겠지!? 역시 답은 기본소득인 건가… 하지만 그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 자체 기본소득이 가능해지는 방법은 재테크인가? 이 시간에 재테크 공부를 하는 게 맞지 않나?
애써 확보한 공상의 시간이 자꾸 인생계획으로 변질(;)되고 마는 주된 이유는 혼자인데 가난할까 봐 + 지금의 근로소득만으로는 내 집 마련은 어렵다는 현실 인식 때문에. ‘그래. 이 걱정들은 앞으로 살면서도 계속할 거니까, 나여!!! 제발!! 지금 만큼은 하지 말자’ 다짐하면서 혼자인 사람들의 글을 찾아 읽는다.
함께이길 포기하지 말아요, 우리는 이런 모양으로 사랑을 해요, 힘들어도 내 곁엔 그가 있어요,라고 이야기하는 글들이 좋을 때도 많지만 지금의 나는 조금 약한가 보다. 그런 글을 읽으면 문득문득 ‘함께하는 것’을 ‘잃어버렸거나 아직 내 손에 쥐어지지 않은 상태’로 여기곤 한다. 그 글들을 실컷 좋아하면 나의 현재를 덜 좋아하게 되는 것처럼 느끼는 곤란한 마음의 상황이랄까. 그리하여 그토록 좋아하던 밀레니얼 기혼 에세이스트들의 책을 끝까지 읽지 못하게 되었다. 진짜 나의 마음은 무엇일까. 혼자? 함께? 혼자? 왔다, 갔다, 굳이 마음을 딱 정하지는 않더라도 혼자여도 좋은 글들을 좀 더 읽어볼 필요를 느끼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말인데... 아, 내 외로움으로 타인의 외로움을 건네다 보면서 미지근한 온도로 조심스럽게 이웃과 우정을 나누는 장면이라니요. 한정원 작가님, 글에 와사비 발라 놓으셨나요, 자꾸 매워 죽겠는 제 코 어쩔???
현재의 내 상황(혼자서 풍족하지 않은 채로 나이 들어가기)에서는 가장 도모하여 볼만한 형태의 연대(저자님 레벨의 내면세계를 구축하는 게 더 어려울 것 같기도)로 느껴지자 이런 장면 또 없나 기대하고 책장을 넘겼더랬다. 너무도 당연히!! 계속 나왔고!!!! 어느새 나는 위로당하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좋은생각><연탄길> 감성은 절대 아니고요…. 그렇다고 <나 혼자 산다> 이런 느낌도 정말 아니고요…. 암튼 표현이 비루해서 죄송한데요… 저도 이제 에세이 읽을 만큼 읽어서 엥간치 잘 쓰지 않으면 흔들리지 않는데(?) 요, 이건 잘 쓰는 게 아니라 주관적인 저의 기준에 정말로 ‘잘 사는’ 사람의 이야기여서… 여러분 이 책 꼭 삽시다. 작가가 돌보는 길냥이들 사료값에 인세 보태라고…. (갑자기 등장한 아무도 안 시키는데 저 혼자 뜨거운 영업 모드 자아)
혼자되기를 선택했다고 한들 너무 자기 자신으로만 가득 채울 필요는 없으며, 외롭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는 담담한 에티튜드에 마음이 오래 머물렀다. 시간도 삶도 관계도 사랑도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유한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온당한 자기애와 사람에 대한 사색. 사실 알고 싶지 않지만- 알아야 한다면 꼭 그 처럼 알았으면 좋겠다.
“(124~125) 나는 시와 저녁이 잘 어울리는 반려라고 느낀다. 모호함과 모호함, 낯설음과 낯설음, 휘발과 휘발의 만남. 바로 그러한 특질 때문에 시도 저녁도 어려운 것인데, 어느새 나는 그것에 기대서만 간신히 살아간다. 뚜렷하고 익숙하며 사라지지 않는 것은 이 세계 어디에도 없음을 알게 되어서이다 … 세상과의 결속에서 틈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나의 내면이 나의 존재와 끊어지지 않으려 분투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누구인지 영영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계속 시도해보겠다는 의지 같은 것.
저녁은 그렇게 시를 읽는 나와 함께 늙어간다.”
마지막으로 영업멘트 쐐기박기.
실은 첫 페이지를 펴자마자 반하고 말았다. “(11) 눈이 더 쌓였을 것 같은 길을 부러 골라, 머리카락과 뺨과 발목이 젖도록 걷고 또 걷는” 산책자를 좋아하지 않을 재간이 나에게는 없다.
정말인지 오랜만이다. 닮고 싶은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닮고 싶은 사람을 글로 만난 것은.
2021-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