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얼룩 Apr 29. 2021

'지지'하고 있음을 마음껏 티 내기

신뢰와 지지를 공동의 언어로 [2017년 '캄비아' 연극 프로젝트]

 군 복무를 마치고 25살이 되던 해, 1월 의정부에 소재한 '몽실학교'에서 길잡이교사로서 새로운 활동을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나는 러닝 퍼실리테이터로, 교육과정 컨설턴트로, 학습자 주도 교육과정 강사가 되었다. 지금까지도 몽실학교에 길잡이교사로 결합하면서 청소년들, 길잡이교사들과 지지고 볶으며 매주 주말을 바쁘게 채우는 중이다.

* 몽실학교는 경기도교육청의 사업으로 옛 경기도 교육청 북부청사 건물에 자리 잡은 청소년자치배움터다. 청소년이 방과 후, 주말에 모여 "우리가 하고 싶은 것으로 세상을 이롭게 하자"라는 슬로건 아래 학습자 주도 프로젝트를 직접 설계하고 실행하고 있다. 첫 번째 의정부 몽실학교를 시작으로 현재 김포, 안성, 고양, 성남에 몽실학교가 세워졌고, 다른 경기도 지역에서도 몽실학교 개관을 준비하고 있다.  

 맨 처음, 모든 역사의 시작이 가장 기억에 강하게 박다. 지금 나를 만들어낸 시발점이라는 마법 같은 순간으로 기억된다. 작은 발걸음을 떼는 그 순간 내딛는 보폭은 분명 미비하지만 나의 역사에서는 상당한 업적인 것은 분명하다. 요령이 없어 오랜 시간을 쏟았고, 처음이기에 쏟아낼 열정의 크기를 조절하지 못했다. 지금 그 당시를 회고하면, 누구나 첫 경험을 대하는 마음처럼, '내가 다시 그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조금은 단호하게 부정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2017년 1년 간의 프로젝트는 무엇보다 고정관념을 천천히 녹여줄 불씨가 옮겨붙는 혁명의 시간이었다. 그 불씨는 여전히 내 안에서 길을 비추는 등대다. 동기부여를 촉진하는 것이 학습과 관계의 시작이자 과정이자 끝이라는 믿음이 나아가는 길에 첫번째 지워지지 않을 발자국을 남겨놓았다.


  앞으로의 긴 서사를 열어줄 이 글은 교육(퍼실리테이션), 나아가 관계라는 거대한 개념 속에 가장 우선순위에 놓여야 할 요소를 찾아가는 초심자의 이야기다. 초심자를 이끌어줬던 동료들과의 1년 간의 기록이고.


 지지와 신뢰를 그룹의 언어이자 '그라운드 룰(Ground Rule)'로 치환하는 작업이다. 


2017 몽실학교 캄비아 연극 꿈의학교

누구도 쉬이 맡으려 하지 않은 아이들 


 구체적인 이야기에 앞서 '몽실 학교'에서 프로젝트가 운영되는 가장 기본적인 구조를 알아야 한다. 몽실학교의 세부 교육과정, 프로젝트는 모든 과정이 시작되는 시기에 모든 청소년이 참여하는 '기획워크숍' 과정을 겪으면서 만들어진다. 전문가나 교육자가 설계해놓은 교육과정을 선택하는 것을 넘어 직접 배우고 실행하고 싶은 욕구를 공동의 프로젝트를 만들기 위해 총 2~4주간의 시간을 온전히 기획을 위해 투자한다. 물론 이 모든 과정에는 길잡이교사(퍼실리테이터)가 함께 참여하면서 프로젝트를 청소년이 직접 설계할 수 있도록 돕는다. 기획 워크숍 단계를 거쳐야만 본격적인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 있다. 프로젝트가 모두 만들어지면 그제서야 길잡이교사에게 본인이 담당할 프로젝트를 선택할 차례가 돌아온다.


 내가 처음 프로젝트를 맡게 된 것이 2017년 1월, 겨울방학 과정부터다. 길잡이교사 회의에 처음 나가 당장 약 3개월 간 도맡을 프로젝트를 선택해야 했다. 기존 공동체에 새롭게 꼽 끼니.. 결국 아무도 선택하지 않은 프로젝트 하나가 남더라. 그게 바로 '캄비아 연극팀'이었다. 후문에 의하면 당시 길잡이교사와 청소년들이 '새로 들어온 교사가 결국 저 팀을 맡았구나..'면서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고.

 캄비아 연극팀은 베테랑이다. 주로 고등학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자 학교에서 연극 동아리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다. 배우들 뿐만 아니라 감독, 조명, 소품, 메이크업까지 가능한 완벽한 팀이었다. 몽실학교의 특성상 불특정 다수의 학생들이 신청하기 때문에 미리 멤버를 조직해놓고 추가로 들어오는 몇몇의 학생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프로젝트를⁰ 이끌어가는 리더 그룹은 몇년 째 몽실학교 프로젝트에 이런 방식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문제는, 캄비아는 공동체를 강조하는 다른 프로젝트들과 마찰이 있었다. 예술 분야다 보니 프로젝트의 작품, 즉 최종 연극 공연이 가장 중요했던 것이다. 공연분야 동아리 특유의 독립심과 단단한 폐쇄성, 연공서열제를 고루 갖춘 아이들이었다. 무엇보다, 3개월 남짓 겨울방학 동안 매일 모여 8시간 연습을 이어온 열정-충만 친구들이기도 하고.. (선생님들이 이 팀을 피하려 했던 이유는 분명 엄청난 연습시간 때문이었으리라)


 이들과의 3개월, 프로젝트가 끝난 이후 한번 더 도전한 9개월의 장기 프로젝트, 총 1년의 시간은 신뢰와 지지(응원)가 엄청난 변화를 이끌어낼 힘이 있음을 알게 해 주었다. 단기, 단회 워크숍에서도 그룹 내 상호 신뢰 정도를 파악하고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뢰는 그 자체로 결과물이다. 전체 과정을 끝낸 이들이 서로 공감하고 신뢰하고 있는가; 내용을 채우는 것만큼이나 놓칠 수 없다. 사실 나는 '진짜' 내용을 채우는 것이 바로 구성원들 간의 신뢰와 공감이라 믿는다.

 



신뢰를 켜켜이 쌓아 올리기 위한 전제조건 


 신뢰는 쉽게 쌓기 어렵다. 그렇다고, 마냥 어렵기만 한 것은 또 아니다. 교육 과정에서, 공론장에서 어떻게 신뢰를 쌓을 수 있을까?

 여기서 신뢰 관계는 강사(퍼실리테이터)와 학습자, 그리고 학습자와 학습자 사이로 나눌 수 있다. 퍼실리테이터는 하나의 단일 분야 지식 전문가가 아니다. 소통과 협업의 전반적인 과정을 이끌어가면서 공동의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최선의 방책을 고민하는 사람이다. 퍼실리테이터가 이끄는 공론장에서 해당 분야 전문지식이 가장 얕은 존재는 슬프게도 퍼실리테이터일 가능성이 높다.

 캄비아 연극 프로젝트 구성원 중 연극에 대해 가장 문외한은 바로 길잡이교사인 나였다. 학습자들에게 지식 전문가는 필요 없었다. 본인만의 창작극을 올리고자 했던 학습자들은 좌충우돌하면서 본인들만의 힘으로 모든 과정을 감당하고자 했다. 캄비아를 맡으면서 연극도 보고, 시나리오도 공부하고, 무대 장치 사용법을 익혔지만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이 꼴자리는 내놓지 못했다. 이 학습자들에게 퍼실리테이터인 나는 필요한 존재였을까?

나를 이렇게 막(..) 그릴 수 있다는 것도 신뢰를 얻었다는 징표로 받아들이자...


 전체 과정을 설계할 때, 결과물(연극 공연)을 위해 용인되어왔던 폐쇄성과 위계를 민주적인 과정으로 풀어내고 싶었다. 결과를 위한 과정이 아닌 과정으로서 결과물이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신뢰와 지지를 기반으로 한 그라운드 룰 설정이다.


* 그라운드 룰(Ground Rule)은 공론장이나 프로젝트에서 기본으로 지켜야 할 규칙 등을 정하는 과정이다. 강사가 정하기도 하지만 참가자가 직접 규칙을 설정하고 직접 지킬 수 있도록 한다. 대부분 워크숍 과정의 첫 여는 활동으로 진행되기도 하지만 장기 프로젝트로 운영되는 경우 초기 설정된 그라운드 룰이 구체적인 실행의 형태로 참가자의 머릿속에 자리 잡도록 해야 한다.  


 신뢰와 지지를 기반으로 한 그라운드 룰을 설계하기 전에 퍼실리테이터에게 전제조건이 있다.    


 하나. 시간

  온전한 참여를 뜻한다. 신뢰는 켜켜이 쌓인다. 워크숍이든 장기 프로젝트든 간에 그 과정에 약속된 시간을 온전히 투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종종 장기 프로젝트의 일원으로 퍼실리테이터가 참여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청소년 관련 활동은 대부분 퍼실리테이터가 함께 전체 과정을 조력한다. 하지만 학습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조력자라는 이유로 온전한 시간을 투여하지 않는다면 신뢰는 쌓일 수 없다.

 캄비아 연극 프로젝트는 겨울 방학 2달간 하루 8시간씩 주 6일을 모였다. 결과 발표 이후 시간을 따져보니 거의 160시간 육박했다. 이 때는 군 제대 직후라 시간이 참 많았더랬다.. 이후 학기가 시작하고 난 이후 새로운 캄비아 활동에서는 서로의 시간을 조율해 현실 가능한 시간으로 조정할 수 있었다. 사실 현실 불가능한 3개월 160시간은 퍼실리테이터에게 불가능한 조건이었다. 그렇기에 이전 교사들이 캄비아 구성원들과 신뢰관계를 만들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캄비아를 이끌던 팀장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어른이 프로젝트를 함께 동료로 참여하는 것이 얼마나 큰 지지가 되는지 몰랐어요. 감정적으로나 활동을 위한 다양한 일들(행정-대관-실무)에서도 말이에요."

 이 사실을 인지하게 된 캄비아 구성원들은 이제 교사의 시간도 배려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그 당시 나에겐 시간이 너무 남아돌았다.



두울. 태도

 학습자의 전문성, 혹은 배움을 위한 열정 등을 존중하는 태도가 핵심이다. 퍼실리테이터에게 전문지식은 일종의 소스다. 공론을 이끌어가는 핵심적인 키워드와 질문들을 설계하고 조건부로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문 지식이 있더라도, 학습자가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살짝 숨기는 센스. 대신 학습자에게 공동의 목적을 위해 나아가는 길의 갈피를 잡고 구체적인 실행을 돕는 퍼실리테이터의 존재 이유를 각인시키는 것이 좋다. 학습자가 가지고 있는 암묵지, 전문 지식들과 퍼실리테이터의 진행, 설계가 어우러지면 서로 필요한 존재가 되어 조화를 이루어보자.

 공론장이나 프로젝트의 목적을 학습자뿐만 아니라 퍼실리테이터가 함께 공유하는 태도로 학습자와 퍼실리테이터 사이에 끈끈한 동료애가 형성된다. 동료애는 학습자의 핵심적인 동기부여 요인이다. 동료애는 다른 글에서 한번 더 자세하게 설명하도록 하자. 어쨌든, 다른 이유를 차치하고서라도 160시간을 함께 동고동락했던 캄비아 녀석들과의 2017년 상반기는 동료애로 가득했다.


 


공연을 홍보하기 위해 거리 공연도 나섰다.


신뢰와 지지의 Ground Rule 


 Ground Rule은 설정보다 이행에 방점을 찍는다. 그리고 장기 프로젝트의 경우 규칙은 구체적인 형태로 발현한다. 따라서 그라운드룰은 형식적인 행위가 아니라 실행과 변화를 위한 전략적인 수단으로 기능한다. 결국 그라운드룰의 암묵적인 가치들이 결과를 만들어내는 데에 핵심 키워드가 된다. 그라운드룰이 공동의 언어를 설정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예를 들어 기관의 1년 사업을 평가하는 워크숍에서 그라운드 룰에 '(상급자가 발언을 독점하지 않도록) 타이머를 설정해 발언시간을 평등하게 배분한다.'라는 규칙을 설정했다고 가정하자. 상급자의 발언은 자연스레 Big Mouth가 되기 마련이다. 이 가능성을 차단하고 경력이 짧지만 다양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 현장에서 업무를 직접 담당한 직원들의 발언이 공론장에 쉽게 등장할 수 있다. 이때 '의견에 대한 피드백은 부정이 아닌 긍정과 보충으로' 규칙이 추가된다면 건설적인 피드백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 논의의 과정을 이끌어 가는 것이 바로 퍼실리테이터다.

 위 논의의 과정의 목표는 기관의 지난 1년 사업을 건설적인 피드백으로 새로운 1년을 준비하기 위한 워크숍이다. 내면에는 1년 간 고생해온 직원들 사이의 신뢰도를 다시 점검하고 지지를 통해 북돋우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그라운드 룰은 이 내면의 목적을 고려해야 한다.


 장기 프로젝트인 캄비아는 처음 시작할 때 구체적인 그라운드룰을 정하지 않았다. 대신 하나의 규칙을 정한 것은 바로 '지각비'였다. 지각한 사람이 1,000원씩 벌금을 내고 나중에 다 같이 회식을 하기로 한 거다. 나는 양보를 제안했다. 오랜 시간 진행하는 프로젝트이기에 한 공간을 점유하게 될 가능성이 많았다. 만약 공간 이용을 바라는 다른 그룹이 있을 때에는 최대한 상황을 고려해서 양보를 하자는 내용이었다.


 이 두 가지는 명시된 그라운드룰이었지만 캄비아는 시간이 지나면서 구체적인 암묵지 규칙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것을 정리해보자면, 

1. 각자의 연기와 맡은 일에 대해 부족하더라도 비난하지 않는다.
2. 놀 때는 다 같이 놀고 할 때 제대로 하자.
3. 공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 손으로 만들자
4.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말자.   

 

 시간이 지날수록 캄비아 프로젝트의 구성원들은 서로를 마주 보기 시작했다. 동료로 인지하고 교육과정을 넘어서 삶에서 만날 수 있는 친구가 되어갔다. 가장 큰 변화는 훌륭한 공연을 올리는 것이 목표였던 프로젝트는 구성원들이 다 같이 힘을 합쳐 공연을 올리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는 점이다. 시간이 지나서는 공연에 필요한 소품들, 무대장비들을 직접 만들기도 했으니. 프로젝트 구성원들 표정도 많이 밝아지고 여유도 생겼다. 어떤 날엔 하루 종일 '홍삼게임(술 없는 술게임이다..)'을 한 적도 있다.

 

 퍼실리테이션은 공론장, 교육과정, 프로젝트에서 각자의 신뢰가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집중한다. 이 과정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지지선언이다. 아무리 작은 의견이라도 퍼실리테이터가 나서서 지지선언을 하고, 확장을 위해 새로운 의제로 공론장에 던져놓아야 한다.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그 과정을 겪은 의견들은 사장되지 않는다. 캄비아에는 대부분이 고등학생이었지만 두 명의 초등학생이 있었다. 이 두 친구가 소외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공론장에 등장시켰다. 의견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공론장에서 논의하고 또 이들의 분명한 역할을 팀원 전체가 고민해서 부여할 수 있도록 함께 고민했다. 두 명의 꼬마는 결국 멋지게 공연에서 연기를 펼쳤더랬다.


 그라운드 룰에서는 공론장의 핵심적인 가치를 전달해야 한다. 공동체, 공유, 평등. 누군가 소외되지 않도록 만드는 중요한 장치다. 이 장치는 단지 소외를 막는 수단이 될 뿐만 아니라 평등한 발언 기회를 보장하고, 의도적으로 정체성에 의한 차별을 거부하는 내용을 명시한 규칙들은 결과를 중심으로 생각하던 인지의 구조와 목표의 형태를 교묘하게 바꾼다.


  이것이 바로 과정의 민주성을 만드는 첫걸음이다. 그라운드룰은 민주적인 과정을 만드는 여러 요인 중 하나이지만 모두가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결과물을 지향한다. 그룹, 시간, 태도, 도구들의 설정을 미묘하게 바꾸는 작업이다. 대체로 프로젝트와 워크숍은 결과 지향적으로 편성되기 쉽다. 하지만 퍼실리테이터라면 그 과정을 면밀하게 설계하여 미묘하지만 큰 결과의 변화를 지향하자.


 분명 그 시작은 그라운드룰의 설정이다. 단회의 워크숍이 아니라면 굳이 매번 공간 벽에 적어 놓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신뢰와 열렬한 지지를 약속한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그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지어다.


 지지와 신뢰가 그룹의 언어가 되었을 때 파생되는 동료애만큼 학습과 실천에 큰 영향을 미치는 동기부여 요인도 없다. 그러니 우리 모두가 서로를 지지하고 신뢰하고 있음을 마음껏 티를 낼 수 있는 공론장을 만들어보자. 나부터, 퍼실리테이터부터.

 

2017년 8월 소극장 공연을 마치고.


작가의 이전글 일단, 저는 Motivator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