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을 여는 퍼실리테이터의 태도
퍼실리테이터는 첫 만남을 가장 많이 경험하는 직업 중 하나다. 퍼실리테이터가 서게 되는 자리는 대부분 그동안 면식이 없던 사람들 앞이다. 그것도 참가자들이 나눌 대화의 물꼬를 터야 하는 존재로서 말이다. 사전에 참가자들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고려하더라도 첫 만남의 자리는 어렵다. 많은 퍼실리테이터들이 첫 만남의 어색함을 푸는 스킬을 궁금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이스브레이킹 기술'과 관련된 책들도 많이 찾아볼 수 있고 이 주제만을 다루는 강의도 많다. 긴 워크숍, 교육과정을 여는 30분 정도의 시간이 전체 과정을 잘 풀어낼 수 있는 유대감을 만드는 시간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다면 다양한 도구가 등장하고 놀이의 형태로 가벼운 스킨십을 유도하면서 분위기를 풀어낸다. 성인 학습자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퍼실리테이터로 활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전체 과정을 설계하면서 가장 신경 쓴 시간이 바로 처음 30분이었다. 어떻게 해야 활동 참여에 기대감을 높이고 어색함을 풀어낼 아이스브레이킹 프로그램을 제공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사례를 찾아보고 시도해보았다. 아이스브레이킹을 잘하는 것이 유능한 퍼실리테이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4시간의 워크숍을 마치고 참가자들 몇몇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오늘 과정에서 아쉬웠던 점에 대해 물었더니 모두 아이스브레이킹 활동이었다고 답했다. 워크숍은 잘 마무리되었고 아이스브레이킹 활동도 좋은 호응을 얻었다고 생각하던 나에게는 꽤 큰 충격이었다. 적극적으로 그룹을 이끌었던 참가자들이었는데.. 이 대화는 그동안 진행했던 아이스브레이킹 활동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아이스브레이킹, 전체 과정을 여는 시간의 목적은 무엇일까?
계획서를 쓰다 보면 습관적으로 아이스브레이킹 시간을 '관계 맺기'라고 쓰곤 한다. '얼음(어색함)을 깬다'라는 뜻의 아이스브레이킹은 놀이를 활용해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가 면식을 트는 활동이다. 다시 한번 질문을 해보자면, "과연 아이스브레이킹, 관계 맺기 활동으로 진짜 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
당연하지만, 첫 만남은 어색하고 낯설기 마련이다. 30분의 시간으로 관계는 만들어질 수 없다. 참가자들 사이에 이미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전체 과정을 여는 30분의 시간을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관계성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관계성'은 관계의 성격이며 관계가 지향해야 할 목적이다. 이는 단순히 만남과 대화를 넘어 전체 과정 속에서 관계가 차지하는 위상을 높이는 작업이다.
얼마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서로 관계를 맺는 것은 정말 어렵다. 면식을 트고 말을 건넬 수 있는 계기는 만들 수 있지만 그것이 관계가 맺어진 것이라 착각해서는 안된다. 실제로 우리가 친구를 만드는 과정을 생각해보면 이 사람이 나와 비슷한 관심사를 가지고 있는지, 또 가치관이나 라이프스타일이 비슷한지, 상대를 존중할 수 있는지 등 다양한 조건들이 붙는다. 무엇보다 시간이 필요하다.
대체로 하나의 집단 안에는 빅마우스(Big Mouth)가 생기기 마련이다. 이들이 그룹의 논의를 초반에 이끌어간다. 빅마우스의 역량에 따라, 적극적인 참가자가 얼마나 많은가에 따라 외적으로 보이는 관계가 잘 맺어진 것처럼 보인다. 퍼실리테이터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누군가의 기량에 의탁하게 되는 상황을 경계해야 한다. 퍼실리테이터는 전체를 바라보는 시선을 가지고 소외되고 있는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장치들을 꾸준히 제공하는 것으로 공론장을 구축한다. 되려 퍼실리테이터가 빅마우스에게 휘둘리는 상황도 발생하니 사전에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현장에서 상황을 파악하고 눈치를 채는 예민한 시선도 필요하고.
짧은 교육시간 내에 친밀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관계성을 설정해보자. 사전 정보에서 받을 수 없는 암묵지를 현장에서 파악하고 개별적으로 접근해 참가자들의 동기부여를 촉진하는 요인으로서 관계는 이용되어야 한다. 공동의 미션을 해결하기 위한 협동이다. 단순히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행과 협의를 수반하기에 관계의 형태를 다르게 상정해야 한다. 친밀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협업을 이룰 수 있는 상황을 제시해보자. 관계는 전체 과정 속에서 교육의 목표와 함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관계는 처음 시작부터 교육이 끝난 후에도 이어진다. 전체 교육과정의 맥락에서 관계를 형성하는 단계를 만들어가는 전략이 중요하다. 단기 과정뿐만 아니라 장기 교육과정 속에서도 마찬가지. 나는 협의를 이루어가는 관계가 핵심적인 목적이라는 생각으로 교육과정을 설계한다. 퍼실리테이터 역시 그 관계망 속에 있는 구성원 중 하나다.
퍼실리테이터 역시 참가자들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 구성원 중 하나다. 단지 전체 과정에서 관계성을 설계하고 또 그 관계성을 구성하는 열쇠를 쥐고 있을 뿐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 모여있는 워크숍에서 퍼실리테이터는 관계의 큰 물꼬를 튼다. 자기소개와 간단한 활동을 진행하면서 참가자 간의 긴장감을 해소한다. 처음 만나는 참가자들과의 워크숍은 서로가 본인을 드러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히려 어려운 것은 기존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집단과의 워크숍이다. 기존 집단, 혹은 참가자 내부 친밀도가 형성되어 있는 몇몇이 포함되어 있는 상황이다. 기존 형성된 관계가 내부에 침투하는 것이 긍정적일 수도 있지만 실제 교육과정이 지향하는 목표를 방해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기존 관계를 교육과정 내에서 새로운 관계성을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참가자들 사이의 관계가 구체적인 형태로 구현될 수 있도록 전체 과정을 설계하여 효율적인 워크숍 운영, 워크숍 이후 네트워크가 형성될 수 있도록 고민해보자.
우리가 일상 속에서 관계를 맺어가는 방식을 생각해보면, 누가 친해지라고 해서 친해지는 것이 아니다. 개개인이 스스로 소통하고 공감하면서 형성된다. 아이스브레이킹은 앞서 말했듯 경직된 분위기를 프로그램을 통해 깨는 작업이다. 경직된 분위기를 진행자의 기지를 활용해 얼어붙은 분위기를 깬다는 의미인데, 이 과정에서의 주도성은 오직 강사에게 귀속된다. 짧지만 화려한 프로그램이 과연 관계를 설정할 수 있을까?
아이스브레이킹 활동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4명의 참가자들은 워크숍마다 진행되는 뻔한 아이스브레이킹 과정에 참여하면서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용이한 수준의 적극성을 내보여왔고 놀이 활동을 진행하는 강사의 눈치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청소년 학습자들과 후기를 나눌 때에는 가장 힘들었던 시간으로 뽑았던 것이 첫 만남에 간단한 스킨십이 전제된 놀이 활동인 것도 마찬가지다. 강사를 위한 관계를 만들 필요는 없지 않은가. 참가자가 학습과 소통을 이어가는데 필요한 관계를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계기를 끊임없이 제공하고 그 안에서 관계는 형성될 수 있다.
그 관계는 '친함'과는 거리가 있어도 좋다. 대신 협업을 위한 동료가 되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 모든 과정을 여는 활동은 결과물로 나아가는 초석을 쌓는 작업이다.
자기소개를 상당히 구체적으로 신경 쓰는 편이다. 방법론은 중요하지 않다. 사전에 참여하는 참가자들에 대해 파악하면서 그들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아주 차분한 동기를 마련하는 것을 고려한다. 그렇다고, 참여하는 사람들이 약속된 시간 안에 자리를 뜨지는 않으니까. 활용할 수 있는 전체 시간을 충분하게 활용해보자.
나는 본인을 편하게 드러낼 수 있는 도구들을 사용한다.
1) 정답이 없는 다양한 질문들을 제공한다.
2) 본인을 표현할 수 있는 도구(그림, 카드, 주변 물건 활용)를 제공한다.
3) 사전에 본인을 소개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
4) 교육과정 목표에 따라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은 다르게 기획되어야 한다.
* 굳이 첫 시작 단계에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가지지 않아도 된다.
*아이스 워밍: 차분히 서로의 어색한 관계를 녹여주는 과정.
천천히 얼어붙은 관계를 녹여가는 사려 깊은 교육을 설계하는 철학이다. 프로그램이 아니라 전체 과정 속에 관계성을 녹여내는 퍼실리테이터의 고민이 전제된다. 서로가 공감하고 소통하는 시간. 관계는 단지 프로그램의 수단이 아닌 목적이라는 명제를 가지고 접근해보자. 프로그램이 끝나더라도 이어질 수 있는 삶 속의 관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