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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룩 May 26. 2021

우리의 대화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야기를 눈으로 보는 비주얼라이징

 대화는 특별한 장치가 없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에서 사라진다. 희미하게 대화를 했다는 사실만 남을 뿐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어떤 피드백을 주고받았는지, 대화의 결말은 무엇이었는지 쉽게 기억하기 어렵다. 일상적인 대화부터 업무 회의, 인터뷰 등등 모든 과정이 마찬가지다. 인간이 해내는 대부분의 일들은 대화를 통해 시작되고 끝이 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화 속에는 관계를 이끌어내고 일을 추진하는 핵심적인 요소가 담겨있다. 비록 그 대화가 아주 사적인 대화일지라도 말이다. 만약 모든 대화를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인류는 지금보다 화목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분명히.


 일상적인 대화를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구체적인 주제에 대해 토론하거나 일을 추진하기 위한 미팅, 워크숍에서는 우리의 대화가 사라져서는 안 된다. 대화와 회의의 내용이 휘발되는 것은 단순히 시간을 허무하게 보냈다는 것 이외에도 초기에 발산되었던 가능성과 모델을 상실하는 슬픈 상황을 초래한다. 종종 기록을 놓친 회의에서 쏘아 올린 작은 공은 우주 너머로 사라지고 각자의 기억 파편을 조합해 만든 어설픈 작은 공은 일의 모든 과정을 망쳐놓기 마련이다.


 결국 그 내용들을 어떻게, 잘 정리하느냐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아키비스트의 기록과 퍼실리테이터의 비주얼라이징의 차이를 구분하는 것이다.

2021년 의정부문화재단과 함께 진행했던 워크숍의 비주얼라이징 작업

아키비스트의 자료화

 아키비스트는 대화의 내용을 섬세하게 기록한다. 대화에서 오고 가는 주제와 내용부터 세밀한 표현까지.

 대부분 아키비스트는 한 그룹에 한 사람씩 배치된다. 다수의 참가자가 있음에도 단 한 사람만 대화를 진행하고 모두가 기록을 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권위적인 한 사람의 말을 다른 구성원이 그대로 받아 적고 의견을 내보이지 않는다. 조선시대 사관처럼 귄위있는 한 사람을 위해 기록하는 행위는 아키비스트의 영역이 아니다.

 아키비스트의 본질은 기록과 그 이후의 아카이빙에 있다. 어떻게 작성된 기록을 활용할지, 또 다른 누군가 활용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이다. 단지 녹취를 푸는 작업만 하는 것으로는 회의, 대화, 워크숍의 맥락을 잘 전달할 수 없다. 기록물을 자료화, 콘텐츠화시키고 그 내용이 적극적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원재료로 구성해 놓는 작업이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 아키비스트의 본질은 기록 그 이후의 일들에 방점을 찍는다.

 

퍼실리테이터의 시각화 

  (아키비스트의 기록과 퍼실리테이터의 비주얼라이징 작업은 상호 보완적이기에 별개로 구분이 필요함)

 이 글에서 중심으로 다룰 것은 대화와 토론의 과정을 시각적인 요소로 전환하는 비주얼라이징(Visualizing) 작업이다. 특히 주제에 대해 정해진 틀 없이 다양한 의견을 '발산'하고 이를 정리하는 단계를 중심으로 비주얼라이징 개념을 설명하고자 한다. 구체적인 틀(MATRIX)를 설계하고 논의를 이끌어가는 방식은 다른 글에서 논의하는 것으로.

   

 비주얼라이징(Visualizing)은 구상화, 시각화를 뜻한다. 이는 대화가 이루어지는 과정 속에서 건설적인 방향을 잡기 위해 대화를 정리하고 또 시각적으로 논의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논의의 수준을 단계별로 높여가면서 핵심적인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퍼실리테이터는 전체 과정을 설계할 때 논의 주제, 방법과 함께 이 비주얼라이징 작업의 모델을 설계한다.

 퍼실리테이터 중에는 이 비주얼라이징 작업을 전문적으로 이끌어내는 그래픽 퍼실리테이터가 있을 정도다. 이들은 효과적인 표현방법으로 논의 내용을 정리하는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픽 디자인이라고도 하는데, 논의 내용을 공유,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기법이다. 하지만 그래픽 퍼실리테이터의 화려한 표현방법은 사실 비주얼라이징 작업의 일부분이다. 비주얼라이징은 대화에서 만들어진 인과관계와 수많은 요인 분석을 찾아내는 비주얼띵킹(Visual0Thinking)을 전제로 한다.

청소년들과 1년간의 프로젝트 과정을 설계하는 과정 중 아이디어를 발산하는 비주얼라이징 BGND 작업


 비주얼라이징의 주체는 누구나 가능하다. 퍼실리테이터가 직접 참가자들 전체와 함께 진행하기도 하고, 그룹 내에서 참가자들이 직접 수행하는 경우도 있다.


 비주얼라이징의 핵심은 참가자가 자신의 이야기에 흔적과 증거를 끊임없이 자가 생산해야 한다는 점이다. 대화를 이어가면서도 끊임없이 포스트잇이나 기타 수단을 사용해 자신의 의견과 발언의 증거를 공론장에 뿌려놓는다. 만약 논의가 활발하다면 포스트잇에 키워드를 퍼실리테이터나 다른 구성원이 적는 역할을 해서라도 아이디어의 부산물을 만들어야 한다. 아이디어들이 어느정도 쌓이면 정리하는 작업이 이어진다.

 가장 많이 사용하면서도 논의를 풍부하게 이끌어갈 수 있는 방법이 바로 BGND다.


  * BGND
  B _ Brainstorming; 아이디어 발산
  G _ Grouping; 아이디어 그룹핑
  N _ Named; 그룹 이름 짓기
  D _ Definition; 정의 내리리 (심화 탐구)


 BGND 작업은 다양한 논의를 이끌고 또 구체적인 코어 개념을 발견하는데 효과적이다. 그룹핑을 하는 과정에서는 참가자들이 직접 비슷한 아이디어를 묶어 논의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구분하면서 그룹의 이름을 짓고 탐구 과정으로 나아갈 수 있다. 정의와 탐구 과정은 핵심 개념(Core Concept)과 범주(Category)을 찾아내고 근본적인 인과관계와 요소들 간의 타당성을 점검하는 과정이다. 검증 과정은 또 다른 토론 내용으로 이어지고 이는 주제를 풍부하게 만든다.


  논의에 다이나믹함을 주기 위해 첫 번째 Brainstorming의 다양한 방법들이 있다.

  ① 3.3.3. Talk: 3명이서 3분간 3개의 아이디어, 키워드를 도출하는 방법

  ② Card를 활용한 아이디어 발산: 감정, 사물, 그림이 그려진 카드를 활용해 생각을 확장하는 작업

  ③ 써클: 하나의 주제에 대해 참가자가 모두 발언하는 방법

  ④ 마인드맵: 주제 확장

  ⑤ 논의 주제를 발전시킬 Matrix: 주제에 따라 Matrix 설계 (_ 다른 파트에서 구체적으로 설명)


 이 방법들 이외에도 다양한 방법이 있으나 사실 브레인스토밍은 생각을 풀어내는 행위라는 점에 입각해 상황에 따라, 참가 대상에 따라 구체적인 과정을 설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답은 없으나 충분한 고민은 필요하다는 점.




 코로나 19 여파로 온라인 활동이 늘어나면서 온라인 비주얼라이징 프로그램들이 개발되고 있다. 온라인 프로그램은 오프라인 강의나 워크숍에서도 큰 효과를 발휘한다. 특히 종이 쓰레기를 많이 양산할 수밖에 없는 기존 포스트잇과 전시 활용 방법은 분명 논의를 이끌어가는데 효과적이지만 온라인 프로그램 역시 그에 못지않게 활용 방법이 무궁무진하다.

 

 [Google JAMBOARD]

 잼보드는 구글에서 개발한 프로그램으로 아주 단순하기에 활용하기 편리하다. 빠르게 의견을 내고 수렴하고 정리할 수 있다. 마치 전지에 포스트잇을 붙이는 것처럼 보인다. 간단한 의견을 모아 그룹핑하는 데에 효과적이다.

청년 1인가구 문제를 발견하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안하는 워크숍에서 활용한 JAMBOARD


[PADLET]

 패들렛은 다양한 탬플릿이 있어 다양한 시각적 효과를 제공할 수 있다. 그룹핑, 인과관계 설정, 마인드맵 등 다양한 탬플릿으로 논의를 구체화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또 개인적으로 교육과정 설계를 위한 아이디어 노트로 사용하고 있다. 사진, 링크, 동영상 등 다양한 자료가 탑 가능하다. 아카이빙과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유료결제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공간 활용도를 위한 아이디어 발산, 수렴 과정 정리
키워드 별 인과관계, 타당성, 개념 검증, 탐구 등 다양한 전략을 수립할 수 있다.

 비주얼라이징을 설계할 때 고려해야 할 세 가지 특성이 있다.


비주얼라이징은 소통이다. 한두 사람이 아이디어를 종합, 분석해 재구성하는 방식과 다르다. 한 사람이 정보를 요리하는 것은 오히려 아키비스트의 사후 자료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비주얼라이징은 동시성을 특징으로 하는데, 아이디어가 발산됨과 동시에 아이디어를 생산한 참가자들이 구상화 작업에 참여한다. 또 다른 대화가 발생하고 집단의 아이디어가 도출된다.


 같은 아이디어 재료들이 있더라도 그 내용은 구성원의 합의 과정에 따라 다른 골격을 갖게 되고, 같은 멤버가 진행하더라도 할 때마다 다른 결과물이 나온다. 이 가변성의 특징 역시 비주얼라이징의 장점이다. 퍼실리테이터는 다양한 논의가 하나의 큰 맥락으로 이어질 수 있게끔 교육과정을 설계해야 한다.


 또 다른 특징은 소수 의견의 재조명, 즉 민주성이다. 그룹핑이 되는 것들은 어느 정도 비슷한 맥락에서 예상 가능한 오차범위 안에 위치한다. 그런데, 어떤 의견과도 묶이지 않은 아이디어는 논의 과정에서 주목받는다. 그 내용이 신선한 논의로 이끄는 요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 아이디어가 사장되지 않고 독립적인 지위를 얻을 수 있는 틀을 설계하는 것은 퍼실리테이터의 사려 깊은 설계과정에 녹아들어 있어야 한다.



 이야기는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사라진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그것이 하나의 과정과 결과가 되기까지 많은 이정표와 흔적이 필요하다. 그 이정표를 눈으로 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비주얼라이징이다. 이정표는 길을 걷는 사람들이 직접 꽂는다.


 대화, 우리의 논의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눈으로 볼 수 있게끔 설계하는 것이 바로 길잡이, 퍼실리테이터인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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