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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룩 May 04. 2021

완벽이 어려운 완벽주의자

Project .ZIP _ 수집으로 혜영을 보다

 완벽주의자라는 단어는 까탈스러움을 대변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A부터 Z까지 하나하나 신경 쓰는 히스테릭한 모습. 미디어에서는 어린 나이에 높은 위치까지 올라간 인물에게 이런 이미지를 부여한다.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에 머리를 쥐아짜며 앉아있는 팀장의 모습이 떠오르고, 동시에 부하직원이 피곤해하는 상사의 이미지로 그려지기도 한다.


 대체로 완벽주의자라는 호칭은 타인이 정해다. 함께 일을 수행하고 있는 동료들로부터 받는 훈장, 혹은 비아냥. 상대와 거리감이 생긴다. 마치 완벽주의자는 본인 이외의 사람은 믿지 않고 독단적이며 목표지향적이라 동료들의 어려움은 돌보지 않는 것처럼 느껴다. 이런 의미에서 스스로 완벽주의자임을 밝히는 것에는 까다로운 조건이 붙는다. 일을 완벽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박감으로 스스로에게 가하는 채찍질을 견뎌야 한다. 종종 워킹그룹 안에 존재하는 무임승차자를 애써 무시하면서 그룹의 미션을 끌고 나가는 자신에게 쓸쓸한 위로를 건넨다. 맡은 바 책임을 놓지 못하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또 하나의 방법인 것이다.


  여기까지가 완벽주의자에 대한 성급한 일반화였다.


그리고 여기, 살가운 완벽주의자가 있다. 완벽주의자라고 하기에 어설프다. 속이 다 보일만큼 요령도 없다. 그럼에도 그는 완벽주의자다. 완벽한 모습을 위해 한 없이 가방을 채워가는 혜영을 소개한다. 



 

.Zip Project 혜영전.

혜영 없는 혜영

 혜영은 후드티, 맨투맨을 즐겨 입는다. 문화기획자인 그의 옷장에는 활동하기 편한 옷들이 즐비해있다. 그 옷들은 대체로 그의 옷이 아니다. 엄마가 가끔 입으라고 사주시는 옷들, 플리마켓에서 만난 친구가 입으라며 건네준 옷들, 자매가 입지 않는 옷을 물려받거나 동생에게 올려(?)받은 옷. 빌렸다가 아직까지도 돌려주지 못한 옷까지. 기획자답게 행사 티셔츠도 많다.    타인의 소유에서 애매하게 소유권을 넘겨받은 옷들의 썰은 풍부하게 풀어낸 그는 정작 본인 옷에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가방 역시 마찬가지다. 제대로 된 가방을 들고 다니지 않던 혜영에게 동생이 본인의 가방을 넘겼다. 그 가방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항상 무거웠다. 뚱뚱한 가방을 들쳐 매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은 혜영의 상징이다. 방이 감당할 수 있는 최대치의 용량을 활용하고 있었다. 디자이너가 그런 활용법을 고안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가방에는 그 무게감에 걸맞은 어마어마한 양의 내용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흥미로운 발굴작업은 마치 혜영의 기억을 탐사하는 작업처럼 기억의 퍼즐을 맞추어 가며 진행되었다. 하나의 물건이 나올 때마다 우린 그 물건에 얽힌 기억을 추적했다.

 대부분 사업계획서다. 여러 사업을 동시에 진행하는 그는 L자 파일 안에 여러 사업계획서를 욱여넣어 놨다. L자 파일 역시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최대치를 견뎌내고 있더라. 물론 사업계획서 대부분은 퇴적물처럼 쌓였다. 사업이 다 마무리된 계획서, 관련 자료들이 모두 뒤섞여있다.

 그다음으로 많은 것이 명함이다. 여러 사람을 만나고 다니면서 서로가 건네는 명함들이 가방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가끔씩 커피 쿠폰도 발견했다. 찍힌 도장은 역시 두 개를 넘지 않는다. 또 가장 많이 굴러다니는 명함은 혜영 본인의 것이다. 개인 명함 종류만도 3개나 된다..

 어디선가 받은 임명장, 상장이 딱딱한 케이스 안에서 가방을 지탱해주고 있었고, 그의 영원한 단짝 노트북도 화려한 꽃무늬 케이스에 쌓여 척추를 보호한다.


 이게 왜 가방에서 나오는지 의문인 것들이 있다.

 1. 새 것이라 부르기에 오래되어 보이는 귀걸이

 2. 양말

 3. 환급을 받지 않은 일회용 교통카드

 4. 사과주스

 5. 증빙을 위한 개인정보들

    등등..

완벽주의


 철 지난 계획서, 며칠 지난 주스, 쌓이고 쌓인 명함들, 무수히 많은 메모들. 누군가는 쉽게 버리는 것들은 혜영의 어깨 위에서 존재감을 꾸준히 어필하고 있다.


왜 버리지 않는 거야?


혜영은 이 질문에 다시 역으로 질문했다.


"왜 버려야 하는 거야? 언제 또 쓸지도 모르잖아?" 


그렇다. 그는 후에 혹시, 정말 혹시 모를 필요를 대비하기 위해 버리지 않고 쌓아두고 있었다. '미련'이라고 하지만 사실 완벽을 추구하려는 습관이다. 혹시를 준비하는 태도이다. 자신의 기억을 보존하고자 하는 아키비스트이기도 하고. 물론 정말 그 자료를 활용할 수 있을지는 그 가방 상태를 봤을 때 확답하기 어렵다.


 혜영은 자신의 흔적들을 퇴적물처럼 쌓아둔다. 그것이 그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흔들리지 않은 단단한 땅이 된다. 그것이 활용되느냐의 문제는 의미가 없어 보인다. 업적을 쌓아 올려 탑을 만들고, 으스대는 것 대신 그는 퇴적물을 쌓아 단단한 지질을 만들어 그 땅 위에 서있다.

주변으로 이루어진 중심

 친구가 많다. 주변인들은 그를 돕는다. 혜영의 단단한 중심은 주변인들로 풍부해진다. 비록 가끔 어설프더라도, 본인의 물건을 잃어버려도, 해야 할 일을 깜빡하더라도 그는 쉽게 다시 중심을 잡는다. 잃어버린 것을 찾고 조금씩 완벽해진다.


 우리 모두 완벽해지고 싶지만, 완벽은 누구나 어렵다. 

  아이러니하게도 완벽한 나의 모습은 왠지 상상하기 싫다. 이상적인 모습이 되고 싶지만 그렇다고 빨리 변하고 싶지는 않다. 완벽이라는 굴비를  천장에 매달아놓고 천천히 탐미하고 꺼내먹어야 하니까. 이 이중적인 완벽주의자들이 둘러메고 있는 그 가방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철 지난 서류들, 먹다 남은 음료수, 양말, 버스카드 등등 다가오지 않은 일들을 준비하는 지독한 완벽주의다.


완벽주의는 완벽을 담보하지 않는다. 대신 완벽을 고민하고 완벽을 위한 조각들을 모은다.  짧은 기간 맡은 일에 몰두하는 완벽함도 있지만, 천천히 완벽함을 추구하는 과정도 완벽주의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단단한 중심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는 태도. 그것이 비록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우리가 완벽주의를 향해 나아가는 길이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는 방법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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