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 커피는 술만큼의 힘을 지니고 있다
학교에서 일찍 돌아온 나는,
오랜만에 아빠와 둘만의 시간을 보냈다. 딱히 무슨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내가 살게 있으니 같이 마트에 가달라고 한 것이 발단이었다.
마트를 갔다가 아빠와 내가 향한 곳은 집 앞 새로 생긴 한옥 카페. 예정된 루트는 아니었다. 그 앞을 지나다 이끌리듯 들어갔다. 아빠는 엄마와 몇 번이나 가본 공간이었음에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나를 위해 들어간 듯싶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이랑요........
아빠 뭐 먹고 싶어?"
너 먹고 싶은 거 시켜
음..... 브라우니 하나 주세요!
그렇게 한쪽 구석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잠시 동안 아주 가벼운 침묵이 흘렀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고 아빠와 단둘이 마주 보고 앉은 순간은 아마 지금이 두 번째일 거다. 아무 말 없이 애꿎은 폰만 만지작거린다.
이 중에 누가 제일 잘생겼냐
폰을 들이밀며 아빠가 물었다. 보니 젊었을 적 아빠와 엄마가 함께 서 있는 옛날 사진. 꽤 많은 사람들이 같이 찍혀있었는데 난 그중 가장 눈에 익은 사람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아빠는 쑥스러운 듯 웃음을 숨기지 못하고 에이, 라는 한마디와 함께 바로 폰을 낚아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는 작은 폰 화면을 슥슥 넘기더니 어떤 게 이쁘냐며 다시 폰을 들이밀었다. 카톡 테마. 그런 아빠를 보고 슬쩍 웃으며 거뭇거뭇한 것을 가리켰다. 곧바로 그걸 눌러 내 눈 앞에 갖다 대고는 자랑하듯 핸드폰을 흔들어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아빠와 나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요즘 안 힘드니?
음... 글쎄.. 조금 힘들긴 한데 뭐..
아빠의 꽤나 심각한 표정. 그때 아빠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확실한 건 내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처음으로 꺼냈다. 내가 생각하고 결심하여 나온 어떠한 결과물이 내 입에서 쏟아져 나온 그 순간부터 아빠는 누구보다 집중했다. 내가 첫 운을 떼고 마무리 지을 때까지. 근래 내가 느낀 것들, 생각들, 내가 겪은 것들이 두서없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열아홉 살이 된 이후로 속마음을 숨기는 아이가 되어버렸다. 그게 나를 위한 일이고, 남들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시대의 입시라는 굴레에 얽매인 학생들이 흔히들 겪는 성장통이 될 수 있겠다. 굳이 내 속마음 들춰내서 뭐해...라는 마음이었달까. 그럼에도 암묵적으로 누군가가 나를 이해해주고 알아주길 바랐다. 아마 지금도.
'이타심인 줄 알았던 마음이
결국은
이기심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 건'
- <쇼코의 미소> 中
아빠는 처음 알았네. 그런 생각하는지.
내 이야기를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듣던 아빠가 처음 뱉은 말이다. 처음 알았단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왜 끄덕였는지는 모른다. 그냥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빠도 아빠의 이야기를 꺼냈다. 요즘 느끼고 생각하고 가슴속에 담아놨던 말들. 나와 오빠에 대한, 엄마에 대한 그리고 아빠의 이야기까지. 내게 처음 내보인 것들이었다. 어쩌면 아빠조차 입 밖으로 처음 꺼내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 시간만큼은, 내 앞의 그 사람은 그저 나와 서른다섯정도 차이가 나는, 나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한 사람이었다. 그냥 사람이었구나. 얼추 대화가 서툴게 끝이 날 때 즈음 아빠와 나 사이에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빈 커피잔에 꽂혀있는 빨대만 빨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어나 카페를 나왔다.
2017년 7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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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천십구 년 구월 이십구일
약 3주 전부터 일을 다시 시작한 아빠가 일을 갔다가 돌아와서는 나에게 하얀 봉투를 쥐어줬다.아빠가 내게 쥐어 준 첫 용돈이다.
2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어쩌면 그때 그 순간의 이야기가 안줏거리가 될 수도 있었겠다. 허나 내 나이 열아홉이었기에 커피를 안주삼아 알코올을 내뱉었음에도 부족함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