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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차영수증 Mar 03. 2023

모습_____#2 빨갛고 하얀 꿈


 나는 빨갛고 하얀 꿈을 꾼다. 불규칙적이지만 정기적으로. 누군가에게 둘러싸여서 피부가 터질 때까지 몰매를 맞거나, 그 누군가를 반으로 갈라 내장을 꺼내 찢어 죽이는 꿈을 꾼다. 나는 정신적, 신체적으로 발가벗겨져 모든 이들의 눈초리를 받는 모습으로, 혹은 겨울에 돼지 방어(魴魚)를 잡듯 혈액이 터져 나오는 누군가의 경동맥을 끊고 내장을 다 꺼낸 후, 회를 치는 맛에 희열을 느끼며 깔깔대는 내 모습을 보는 관객으로 서 있다. 예전에는 꿈에서 깨면 헐떡이며 부르르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려 스스로 흉부압박을 했지만, 이제는 자궁에서 갓 나온 태아의 첫 숨만큼 깊은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주변에 피 냄새가 나지 않는지를 확인하고 아침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리고 내 무의식이 빨갛게 절여진 꿈의 사체들을 망각의 영안실에 옮겨와 하얀 천을 덮어 안치하면, 평소처럼 감정의 동요 없이 활기찬 하루를 시작하게 된다. 만 32세, 학교폭력 피해자의 일상이다.



 난 중학생 때 인생에서 다시는 만나기 어려울 정도로 훌륭한 친구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중 가장 친한 친구는 같은 아파트에 살았다. 키도 크고 외모도 준수했으며 성격과 성적을 모두 다 갖춘 사람이었다. 그 당시 ‘엄마 친구 아들(엄친아)’라는 말이 유행했었는데, 그 상징에 적확한 모습이었다. 우리는 방학 때 아침마다 아파트 주차장에서 배드민턴을 쳤다. 운동신경이 부족한 나는 자주 졌지만 지는 순간도 정말 즐거웠다. 그리고 우리 둘 다 책을 좋아했다. 그 친구는 소설책을 좋아했고, 나는 한자와 중국 고전에 푹 빠져있었다. 여름밤에는 같이 아파트 주차장을 돌며 어떤 책을 보았고, 어떤 것을 배웠는지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그때도 글 쓰는 것을 좋아하여 매일 일기를 썼고, 친구들에게 손편지도 많이 썼다. 그리고 가끔씩 시도 썼다. 나는 내 시에 제목을 직접 붙이지 않았으나, 여러 친구들이 내 시를 같이 읽고 제목을 붙여주었다. 날것의 잡생각들을 모아 조잡하게 붙여 만든 판자집 같은 시였지만, 친구들이 비웃지 않고 진지하게 제목을 붙여주는 모습은 정말로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신체적, 정신적 변화로 약간의 혼란을 겪었지만 그 친구들 덕분에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우리는 모여서 어떤 고등학교에 갈지 이야기를 나눴다. 당시 내가 살던 시(市)에서는 무작위 추첨이 아닌 가고 싶은 고등학교에 입학원서를 넣고 시험 합격을 해야 갈 수 있었다. 그중 내가 다니던 중학교와 같은 재단에 속해 있던 고등학교가 기숙사를 운영했었고, 각자의 부모님으로부터 떨어져서 학교를 다니고 싶었던 우리는 그 고등학교에 같이 가기로 했다. 부모님은 사춘기인 아들이 집에서 나와서 살겠다는 말에 처음에는 반대를 하셨으나, 나는 친구들과 기숙사에서 같이 생활하고 싶다며 고집을 부렸다. 다행히 그 당시 나와 내 친구들은 공부를 잘했고, 그 고등학교도 지역에서는 어느 정도 이름이 있었기 때문에 곧 승낙을 받아낼 수 있었다. 나는 친구들과 앞으로 3년 동안 같이 생활할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렘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 설렘이 썩어 들어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무리 이름이 있는 학교라도 불량 학생들은 존재했고, 1학년 때 그들은 나를 희생양으로 지목했다. 나는 너무 쾌활하고 밝았으며 사람들과 다투는 걸 굉장히 싫어했다. 그런데 그 모습이 그들이 원하던 희생양의 모습일지는 몰랐다. 쉬는 시간이 두려웠고 이유 없이 맞았다. 같은 반에 있는 사람들 중 아무와도 친해질 수 없었다. 반면 나와 가장 친했던 친구들은 다른 반에서 다른 인맥을 갖춰가고 있었다. 진지하게 그들에게 도움을 몇 번 요청했으나, 모든 요청은 무응답으로 처리되었다. 그렇게 나는 가장 믿었던 이들에게서 버림을 받았다. 그 친구들이 도와줬다면 맞설 용기라도 있었겠지만 나의 편은 정말 아무도 없었다. 이 사실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관계의 판이 달라졌을 뿐, 보이는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나를 저버린 그 친구는 아직도 나와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고, 기숙사에서 같이 사는 현실도 변하지 않았다. 아들과는 다르게 그 아이의 어머니는 나를 정말로 많이 챙겨주셨다. 다정하고 씩씩한 분이셨고 본인의 자녀를 더 자주 보기 위해 우리 학교 급식실에서 일을 하셨다. 급식실에서 마주칠 때마다 “어머 잘 지냈니? 공부는 잘 돼? 밥은 맛있어?”라고 물어보실 때 눈물을 참는 것이 정말로 힘이 들었다. 당신의 아들은 나를 버렸지만 어머니인 당신은 나를 아직 생각하고 계시는 모습이 나를 살게 만들었다. 나는 부모님을 걱정시켜드리고 싶지 않아서 말을 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아직 그 친구들과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을 하셨고, 나도 그렇다고 거짓말을 했다.



 기숙사의 자율학습시간이 끝나는 오전 12시가 되면 그 사람들과 같이 있던 열람실에서 나와, 창가 쪽 내 2층 침대로 올라갔다. 그리고 베개에 얼굴을 묻어버리고 기도를 드렸다. 자살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리고 나면 젊은 날의 죽음이 무엇인지 알려준 두 학생이 생각이 났다. 중학교 2학년 때, 내가 다녔던 중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던 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은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지만 불량 학생들은 그들에게 전교에 울려 퍼질 정도의 큰 폭력을 가했다. 학교폭력을 피해 결국 그 둘은 가출을 했고 교외 지역에 있는 천(川)까지 도망을 갔다. 3월 초, 아직 밤이 낯설고 추운 나이, 집을 나와 머물 곳이 없던 그들은 추위를 달래기 위해 버려진 차 안에 들어가 불을 피웠다. 그리고 차 안에 남아있던 기름에 불이 붙었다. 한 명은 현장에서 화염으로 죽었고, 다른 한 명은 전신화상을 입고 응급실로 후송이 되었다. 이틀 후에 하얀 국화가 학교로 배달이 되었다. 누가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는지 다들 알고 있었지만, 가해자들의 이름은 숨겨지기 급급했고 피해자의 죽음만 이야깃거리로 남았다. 그리고 가해자들은 죄책감을 느끼기는커녕 먹이를 놓친 굶주린 들개처럼 다른 피해자를 찾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한번 피맛을 들인 짐승은 숨통을 끊어놓지 않는 이상, 그 사나운 입이 닫히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죽으면 나는 어디에 묻힐까. 나는 천국에 갈 수 있을까. 그 사람들은 다른 피해자를 또 찾으려고 할까. 그렇게 된 피해자들은 어떻게 죽게 될까. 그런데 정말 죽고 싶지 않아. 대학에 가고 싶어.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어. 부유하던 사념들이 한 겹의 잠으로 덮일 때쯤, 내일 아침에도 눈을 떠서 학교 생활을 선택했다는 사실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너무 가혹하게 느껴졌다. 나는 행복을 위해 이곳을 선택을 했지, 불행을 위해 여기에 온 것이 아니었다.



 다행히 2학년 때 문과와 이과로 갈라진 후, 내가 선택했던 이과에는 우연히 좋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인연과 노력을 통해 같이 어울릴 수 있는 사람들이 생겼다. 하지만 나의 사회성은 보관기간이 지나 파쇄된 서류같이, 한 때 중요한 자료였으나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버려진 모습이 되었다. 중학교 때부터 매일 썼던 일기는 거의 쓰지 않게 되었고 모든 것이 차라리 잊혀지거나 사라지길 바랐다. 아무도 진실하게 믿을 수 없었고, 아무에게도 솔직히 말할 수 없었으며, 한때 가장 친했던 아이들과는 다시는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나에게 남은 것은 죽고 싶지 않다는 의지뿐이었다. 다행히 나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살아남은 후에도 환상통은 계속되었다. 졸업 이후 성인이 될 준비도 하기 전에 빨갛고 하얀 꿈은 곧바로 나를 찾아왔고, 학창 시절 숨겨왔던 비린내는 기숙사를 떠난 후 가족과의 재합병과 동시에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어 새벽잠이 줄어든 아빠는 아무도 없는 조용한 거실에 나와 가만히 앉아 있거나 티비를 볼 때가 많았는데, 새벽마다 귀신 들린 사람처럼 문법은 없고 단어만이 남은 말을 내뱉으며 잠들어 있는 나를 보고 걱정하셨다. 나는 환경이 갑자기 달라져서 그런 것일 거라고 둘러댔다. 그러나 그건 하얀 고통에 숨이 멎어가던 내가 살려달라고 했거나, 그들의 죄를 읊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부모님과 공유했던 기억들도 나를 괴롭게 했다. 나와 그 사람들은 서로의 집에 자주 놀러 갔기에 서로의 부모님도 잘 알고 있었다. 부모님은 그 사람들이 중학생이었을 때 기억을 갱신하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외출할 때면 엄마는 내가 그 사람들을 만나러 나가는 줄 알았고, 그 사람들의 안부를 물어보기도 했다. 그때마다 반사신경처럼 “예”라고만 답변했다. 더 이상의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모두가 다 떠나가 버린 내 인맥 사업을 개편하기 위해, 내가 살던 지역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외로움이라는 인생의 적자를 면하기 위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마지막 영업 수단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모든 관계가 일회용 같다는 생각은 떨쳐낼 수가 없었다.



 살아남은 자로서,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게 가장 고통스러웠다. 어느 정도 친분과 신뢰가 쌓이게 되면 마음에 있던 이야기를 꺼내고 공감을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내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 만큼 친하거나 신뢰할 수 있는 이들이 없었다. 그리고 친해진다고 해도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분야에서 나는 원어민이 아니었다. 이야기를 꺼내는 내 모습을 그린 시나리오를 여럿 구상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나와 가까워지지 않는 결말로 이어졌다. 특히 나의 부모님에게 “당신의 자식은 따돌림으로 인해 자살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었고, 그 친구들이라는 사람들은 당신의 자식을 버렸다”는 사실을 말하는 모습은 언제나 공멸(共滅)의 결말로 끝이 났다. 반전은 없었다.




 친구라는 단계에 들어서기 직전인 사람들에게도 넌지시 말해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 맞서지 않고 뭐 했어?’ ‘다 잊어버려’ ‘그냥 용서해. 그걸 마음에 품고 살면 너만 힘들어’라는 2차 가해만 돌아왔다. 내가 왜 맞서지 못했고, 친구에 관한 기록과 감성이 상실된 모습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설명할 기회를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지인혹은 인연의 찌꺼기로 남았다.


 왜 맞서지 않느냐고 만용을 부리는 이들은 우스웠다. 학교나 회사에서 부당한 일을 당했는데 자신의 편은 하나도 없고, 다른 갈 곳이 없는 상태라면 맞설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평범한 사람들은 그냥 참고 산다. 나도 그 평범한 사람 중 하나라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왜 잊지 않느냐며 망각을 자만하는 이들은 거슬렸다. 시험 전에 아무리 많은 것을 외우려고 해도 다 외워지지 않고, 극도로 슬프고 힘든 일들은 기억이 아닌 기록으로 남는다는 사실을, 기억과 망각은 본인 의지의 소관이 아니라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왜 용서하지 않느냐며 성인처럼 말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벌을 받기를 바랐다. 용서는 피해자의 감정 수용과 결정이 뒷받침되어야 하며, 제삼자가 그것을 함부로 이야기해서도 안 되는 것, 고통은 도덕보다도 무겁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이런 것들을 설명해주려고 해도 이를 듣는 이, 내가 말하게 두는 이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 이야기를 위해 언제나 뒤에서 숨어서 울어야 했다. 이 청춘의 한 장을 넘기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주변에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펼쳐진 모든 고통과 사건들은 그냥 운이 없어서 그런 거였다고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 “천지는 인자하지 않으니 마치 사람들이 지푸라기로 엮은 개(쓸모없는 물건)를 대하듯, 만물에 무관심하다.”라는 도덕경의 구절처럼 그들의 일들은 그들의 의지, 감정, 능력에 상관없이 그냥 일어났을 뿐이다. 그리고 그 일들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어떤 상처를 입었는지에 대해서도 꾸짖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만 “고생했어. (죽지 않고) 살아줘서 고마워”라고 한 마디만 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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