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양육권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많았다. 주일학교 선생님으로 일할 때도, 소대장으로 일할 때도, 현재 운영하고 있는 공부 모임에서도 피양육자가 있으신 분들은 늘 있었다. (‘양육권을 가진 사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는 기구한 사연으로 인해 친부모가 아닌 이들이 양육을 하는 분들이 계셨고, 유전자 동일성이 없더라도 같은 사랑을 주는 모습을 부모라는 단어로 구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모두를 수렴하는 적확한 단어를 찾지 못해 해당 표현을 쓰기로 했다.) 그분들에게 피양육자의 장래와 교육에 관한 질문이 던져지면, 분 단위로 실시되는 검찰조사를 받는 피의자같이 피양육자를 위해 얼마나 세세한 것까지 치밀하게 관리하고 관여했는지를 털어놨다. 그리고 피부양자의 장래는 수령 예정인 연금처럼 현실화의 범위와 시기가 명확하길 원했다.
학창시절을 회상해보면, 양육권자의 바람처럼 학교에서도 학생들에게 언제나 장래희망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 모습을 장려했었다. 차후 미래를 설계하는 연습을 시켜준다는 명목 하에 나중에 커서 어떤 직업을 가지길 원하는지, 양육권자는 어떤 장래를 원하는지 주기적으로 확인하며 초시계처럼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그런 부푼 기대로 장래라는 로또를 산다고 해도 당첨과 직결된다는 보장은 없고, 오히려 더 명성이 있는 대학에 진학을 위한 공부 동기의 연료로 사용될 뿐이었다.
나도 여러 학생들처럼 인생의 큰 목표나 꿈을 가지고 살아가지는 않았고, 직업에 대한 흥미만 약간 있었다. 초등학생 때는 학교가 끝나면 스펀지밥이랑 포켓몬스터를 보거나 그리스 로마 신화 만화책 빌려 볼 생각밖에는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과학에 관심이 생겨 방과 후 과학반에 들어가 여러 가지 실험을 했다. 특히 전기를 이용해 물을 산소와 수소로 분리한 다음, 수소로 가득 찬 비커에 성냥불을 넣어 ‘펑’하는 소리를 듣는 것은 청각과 지각(知覺)을 만족시키는 최고의 경험이었다. 그 경험 때문인지 나는 과학자가 되고 싶어졌다.
중학생 때는 집에 있던 고우영의 십팔사략(중국의 신화, 삼황오제부터 북송과 남송 시대까지를 다룬 역사 만화책)에 빠져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읽었고, 도서관에 가서 일지매, 임꺽정, 열국지, 수호지 등 다른 고우영 만화와 중국 고전을 탐독했다. 특히 서유기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이나 사자성어가 가진 압축의 미학에 푹 빠졌고, 방과 후 한문반에 들어가 한문을 배웠다. 수업은 서당 같은 느낌이었지만 스승이 매를 들고 제자를 울리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한문 선생님과 아빠가 쓴 한자 획(劃)들의 비례와 균형에 경탄하며, 집 한구석에 있던 갈대빛 그늘이 진 오래된 옥편과 데구루루 동그란 만년필을 만나 매일 한자 쓰기 연습을 했다. 그렇다고 훈장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학교 내 자살 사건과 친할머니의 죽음으로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이 많아졌다. 인간은 어떻게 살고 죽어야 하는지, 죽으면 어디로 갈 지에 관해 생각하게 되었다. 교회를 정말 열심히 다녔고 매일 성경책을 읽으며 종교의 목적에 대해 고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죽음 속으로 침전하는 사람들이 삶의 기회를 한 번 더 가져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의사가 되고 싶어졌다.
고등학교 때는 따돌림과 배신으로 모든 것에 회의감이 들었고,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성적은 바닥까지 떨어졌고 살고 싶은 생각 밖에는 없었다. 그러다 3학년 때 처음 듣게 된 생물학 인터넷 강의에 매료되어, 생물학 공부에 미쳐 살았다. 생명체의 기본 단위인 세포와, 세포들이 모인 조직과, 그 조직들이 모여 만들어진 존엄은 밝기는 진리의 눈을 뜨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때 나는 생물학 교사가 되고 싶어졌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학교 마지막 시험과 수능을 마쳤다.
내 점수를 보고 나서 아쉽다는 느낌조차도 없었기에, 원래 나는 생물학 교사라는 것에 흥미만 있었지 인생 목표로 삼은 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도 대학은 가야 할 것 같아서 대학교 순위에 상관없이 통학 가능하며 생물학과가 있는 곳에 원서를 넣었다. 그중 하나에 합격해서 입학했고, 그 후 나는 진로에 관한 생각이 전혀 없이 살았다. 그냥 배우는 게 좋았다.
대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아빠가 나를 식탁으로 부르더니 졸업 후 뭐가 하고 싶냐고 물었다. 나는 학교생활이 재밌었지만 그 이후에 대한 생각과 계획은 빈칸이었다. 그래서 그건 차후 생각해 보겠다고 했지만, 그날 아빠는 이상하게 심각했다. 진로도 없이 대학교에 다니면 나중에 뭘 할 거냐고, 지금 밖에 취업난이라고 뉴스에서 떠드는데 안 들리냐고. 이 시국의 엄중함을 알아야 한다고. 하지만 나에게는 그 말이 취업난의 원흉을 향해 시위라도 시키려는 선동 문구로 들렸을 뿐, 나는 거기서 진보도 보수도 아닌 아빠의 염려를 지켜보는 시청자였을 뿐이었다. 미래를 고려하지 않았던 대가로 졸업 후 인생의 산천(山川)을 굽이굽이 돌아야 했지만, 결국 풍수 좋은 터를 찾아 진로의 집을 세웠다.
만약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완전히 새로운 취미나 공부거리를 찾아 새로운 직업을 가질 것 같지는 않다. 보던 책을 보고, 하던 일을 할 것 같고 그 외에 다른 일들이 나에게 맞으리라 딱히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인간의 흥미와 성향은 본인이 선택할 수 없고 여러 환경적, 역사적, 경험적, 유전적 요소들이 혼합되어 만들어진 산물이며, 우리를 매료시킨 인생의 선택들도 이 산물들을 재가공해 만들어진 또 하나의 산물이라는 이치를 터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선택들은 미래의 원인이 아니라 과거의 결과로 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나는 장래희망을, 특히 직업으로만 규정하는 방식에 심히 의문이 든다. 한 직업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 직업으로 적어도 2~3년 이상을 직접 일 해봐야 하고, 부서나 업계에 대해서 설명은 할 수 있어도, 곧바로 이해할 수 없는 직업도 있다. 또한 그런 세계를 모르는 학생들은 드라마에서나 본 업무만을 상상할 수 있을 뿐, 무슨 일을 하는지 제대로 아는 것은 어렵다. "저의 장래희망은 엑셀 프로그램으로 연간 영업매출과 손실을 계산하여 매년 매출 목표를 세우고, 이를 위한 영업 전략을 수립하며 판촉물을 제작하는 것입니다.”라던지, “저의 장래희망은 ERP 및 기타 정보망을 활용하여 재고를 파악하고 원자재의 가격변동과 환율을 고려하여 최소한의 지출로 최대한의 원료를 구매하는 것입니다."라는 학생이 천하 어디에 있겠는가. 직업의 세계는 이렇게도 복잡하다. 그러나 양육권자와 사회는 학생들이 직업의 세계와 전망에 대해 물어보기도 전에, 전공부터 선택하라고 몰아붙인다. 공자처럼 15세 때 자기가 뭘 배우고 싶은지 알고 (지우학 志于學), 30세에 커리어의 방향을 확고하게 잡으면 (이립 而立) 참 좋겠지만, 그런 건 성인(聖人)에게나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다 택한 전공이 과거의 결과가 아니라, 알 수 없고 불안한 미래의 원인이 되었다는 걸 깨닫고 나면, 성인이 된 학생들은 장래절망에 빠져버린다. 안타깝게도 대다수가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고 있다.
그렇다고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하라’라는, 서점 안 보도블록처럼 쌓여가는 자기 계발서에 묻어있는 심히 감정적이고 추상적인 구절은 사양하고 싶다. 이는 욕구의 깊이를 가늠하지 않고 메아리부터 기대하는, 참으로 무책임한 언사로만 보인다. 우리는 점심은 먹고 싶지만 뭘 먹고 싶은지, 영화는 보고 싶은데 어떤 것을 봐야 할지, 유튜브에서 재밌는 건 보고 싶은데 뭘 봐야 할지 매일 같이 고민하면서도 감이 안 잡히는 삶을 산다. 결국 우연히 조금이나마 끌리는 음식을 고르거나, 하루 종일 영화나 틀어주는 채널을 켜거나,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유튜브 영상을 보는데 익숙한데, 직업에 관한 건 어련할까. 이처럼 우리 자신의 성향과 욕구의 본질을 살피고, 이를 구체화한 후,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과 맞춰보는 건 참으로 어렵다. 우리는 우리 본인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게 직업을 가리키는 말인지, 선호하는 업무를 말하는 것인지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단 한 가지의 업무만 하는 직업은 존재하지 않으며, 직업은 회사와 사회의 요구 조건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연구직으로 일하고 있는 나 조차도 개발뿐만 아니라, 엑셀로 제품의 원가를 계산하고, 워드로 각종 신고자료와 인증서류를 작성하며, 파워포인트로 연구과제 자료도 만들고 발표도 해야 한다. 게다가 설거지까지 잘해야 한다. (내 실험 이후 실험기기 세척과 비커 설거지만 하루 2~3시간 넘게 쓴 적도 있다.) 성과 책정 여부와 선호도가 다르지만 전부 내가 해야 할 일들이다. 만약 설거지 하는 게 너무 싫어 이 직업을 고르지 않았다면, 내 직업은 진로검사에서나 볼 단어였을 것이고, 지금 일하는 회사는 본사(本社)가 아니라 귀사(貴社)였을 것이다. 또한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게 직업에만 국한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직업은 하고 싶은 일이라는 하나의 단위만으로 측정되어서도, 정의해서도 안 된다. 서로 층위가 다른 개념이다.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의 자서전인 ‘호암자전’을 보면 그는 일본에서 대학교를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26세까지 노름만 하며 허송세월을 보내다, 달빛을 안고 자는 세 아이를 보면서 뜻을 세우기를 다짐하고 사업을 시작한다. 실업자 생활을 하더라도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견뎌내느냐에 따라 내면도 달라지고, 무엇인가 남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또한 헛되게 세월을 보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 훗날 소중한 체험으로 그것을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생 황혼의 소회를 남겼다. 장래에 대한 뜻이 없이 살아가는 것을 수명의 낭비라고는 볼 수 없으며, 오히려 수행의 시간이라는 관점에서 나는 이 사람과 의견을 같이한다.
나는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는 장래희망이라는 도착지를 정해 한 가지 경로로만 여정을 떠나기보다는, 인생 곳곳마다 역마살이 놓여있다는 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우리에게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라는 의문을 가지고 떠돌아다니는 날들이 훨씬 많았으며, 찰나의 답을 찾더라도 그 색이 바래 언젠가는 다시 떠나야 할 날이 온다. 나 또한 바람과 물처럼 흘러 답을 구해 가부좌를 틀었으나, 언젠가는 이 자리도 번민과 무흥(無興)의 벌판으로 변할 날이 올 것이며, 그때는 또 다른 의문을 풀이하기 위해 떠나야 할 것을 나는 안다. 다행히 누워 있으면서, 앉아 있으면서, 서서 걸어가면서 여러 깨달음을 쌓고 고집멸도를 바라보는 것에 익숙해졌기에, 또다시 떠돌아야 하는 세월이 이제는 두렵지 않게 되었다. 오직, 나, 스스로를 등불로 삼아 나아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