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엄마아빠는 부부싸움을 했다. 기억나지 않는, 서로의 언성이 높아지는 일이 있었고 화가 난 엄마는 이모 집으로 떠나버렸다. 말다툼이 집 안 모든 소리를 다 들고 나가버리자, 빈 자리로 스며드는 고요를 퍼내기 위해 아빠는 컴퓨터 바둑을 두고, 나와 내 동생은 TV를 켰다. 그러나 아빠의 바둑판은 포충기처럼 환한 컴퓨터 화면에, 날벌레처럼 부딪혀 탁탁 죽어가는 돌로 가득했고, TV에서는 한번 보고 잊혀질, 이름도 모를 사람들이 수도 없이 몰려나왔다. 바둑도, TV도 다툼 전까지 우리가 어떻게 화목하게 살아왔는지 떠올리게 하지는 못했다.
엄마는 해가 진 후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 사이 프라이팬에 마가린을 녹여 만든 프렌치토스트가 저녁 식사로 차려졌다. 아빠는 취사병 출신에 요리에 일가견이 있었고 주말마다 새로운 요리를 선보이는 걸 즐겼지만, 엄마가 없는 집에서 딱히 실력을 발휘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노동자인 아빠가 계란과 기름으로 만든 노동자의 음식을 먹기 시작할 무렵, 아빠는 전화를 받고 몇 마디 나누더니 할머니가 계신 병원으로 가야 한다며 나와 동생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소근거리는 가로등 사이를 지나 할머니를 만나러 병원으로 가는 길. 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신비로울 정도로 포근하고 조용한 겨울밤은 정말 낯설었다. 병원 입구부터 계단을 따라 한 움큼씩 올라가 도착한 중환자실 앞에는 의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오늘을 넘기기 힘들 것 같다는’라는 대사와 죽음의 책임을 전달했다. 드라마처럼 환자의 죽음으로 인한 죄책감 때문에 흐느끼거나 주저앉지 않았으며, 단지 자기가 할 일은 다 했다는 듯한 모습만 남기고 떠났다. 아빠는 나와 내 동생에게 중환자실 앞에서 기다리라고 하고 할머니를 간호하기 위해 마침 병원에 있던 고모들과 같이 안으로 들어갔다. 한 30분이 지났을까. 중환자실에서는 죽음의 출발을 알리는 곡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아빠는 홀로 중환자실에서 나오면서 할머니가 떠나셨으니 들어가 보라는 말을 했다. 아빠가 우는 모습을 본 것은 그때가 두 번째였다.
어릴 적, 아빠가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에 아빠는 울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아빠가 우는 모습을 본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 할머니가 아침 식사 도중 갑자기 쓰러졌을 때였다. 안색이 하얗게 변하고 입술이 퍼렇게 질려 생명이 꺼져가는 모습을 마주하자 겁이 나서 엉엉 울었다. 할머니가 왜 갑자기 쓰러지셨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다 같이 울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구급대원들이 신속히 도착해 음식물 기도 질식인 것을 파악하고, 긴급조치를 한 다음 할머니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그때 아빠는 양손으로 얼굴을 잡고 울고 있었다. 나는 할머니와 사이가 안 좋았던 아빠가 왜 우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 가족은 할머니와 약 7년을 같이 살았다. 할머니와의 동거는 피할 수 없는 부모봉양의 현실 때문이었다. 고모들이 돌아가면서 1~2년씩 모시다 지쳐버렸고 결국 할머니를 우리 집에 가두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고모들이 할머니를 모시고 우리 집에 처음 온 날, 본인들이 할머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고백했다. 하지만 연락과 방문의 횟수는 그들의 고백과는 어긋났다. 할머니는 단지 같이 살기 어려워진 가족이었을 뿐이었다.
할머니는 나이가 들수록 유순해지고 마음을 베풀게 된다는 인류 진화의 원리가 적용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 마음대로 일이 안 풀리거나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성질부터 내고 소리를 질렀으며, 양로원에서도 다른 할머니들과 다투고 집에 돌아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할머니의 그런 모습은 모두를 힘들게 만들었고, 결국 아빠와 부딪히는 일도 잦았다. 아빠와 할머니 둘 다 다혈질에 고집이 있는 성격이었고, 견해의 틈은 참으로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엄마는 그 사이에서 시어머니를 친절히 대하려고 했으나 심리적 한계에 부딪히면 고통을 호소하거나 울 수밖에 없었다. 아빠는 엄마의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할머니에게 더 화를 냈고, 할머니는 왜 본인 때문에 가족애가 찢어지게 되는지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할머니의 죽음 전까지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할머니와 잘 지낸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나는 먹는 것도 좋아하고 교회 주일학교에도 열심인, 할머니들이 좋아하는 손자상에 알맞은 어린이였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내가 장손(長孫)이라며 예뻐해 주었고, 할머니 덕분에 신비한 음식들도 여럿 먹어볼 수 있었다. 그러나 가족관계의 악순환이 할머니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점차 인식하게 되었고, 할머니의 모난 성격에 지쳐 점점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리고 할머니는 자기 방에 스스로를 가두고 천국에 갈 날을 꿈꾸며 홀로 기도만 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할머니와 사이가 안 좋았던 아빠가 우는 모습을 이해하지 못했던 나도, 할머니의 시신 앞에서 한참을 울었다. 그렇게 울고 나서 할머니를 보니 할머니의 얼굴은 하얗지도 않았고 입술도 파랗지 않았으며 그토록 원하던 천국 열쇠를 가진 사람처럼 편안해 보였다. 심장박동 측정기에는 조용히 잔잔한 물결이 일었고, 오히려 흔들면 곧바로 일어날 것 같은 생명력이 느껴졌다. 예전에 질식의 모습을 한번 목격했던 나에게는 이것이 죽음의 모습이라는 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장례식은 곧바로 진행되었고 어른들은 전부 장례식장에 남아 조문객을 맞이했다. 엄마는 나와 사촌들에게 자고 아침에 다시 오라며 저녁마다 집으로 보냈지만, 친하지도 않은 사촌들과 밤을 같이 보내는 것, 그리고 할머니와 같이 살았던 나에게 애도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 싫었다. 나도 어른들과 같이 장례식장에 남아 할머니의 죽음을 기리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집에 돌아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할머니가 나사로 (신약성경 등장인물. 예수님의 기적으로 인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처럼 다시 살아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다 잠이 들었다.
상이 끝나고 장지(葬地)로 옮겨져 매장이 된 할머니 위로 인부들이 땅을 밟으며 삶과 죽음에 대한 타령을 했고, 담임 목사님의 추모기도로 장례식은 끝을 맺었다. 그리고 다들 할머니를 놔두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장례식 후 할머니의 흔적은 서서히 폐기되었다. 유품은 수많은 약봉지, 부항, 십자가, 촛불 등이 다였고, 할머니의 방에는 노화와 외로움의 고통을 잊기 위해 먹었던 약들의 부스러기와 냄새만 남아있었다. 유서도, 사랑한다는 말을 남긴 글조차도 없었다.
신기하게도 할머니가 떠난 후 가족들의 번뇌는 전부 소멸되었다. 엄마와 아빠는 눈물을 닦거나 울분을 표현하기 위해 손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었다. 매년 친척들이 모일 때마다 서로를 찔러대던 부양가족의 의무와 비용에 대한 언쟁은 사라졌고, 1월 1일에는 모두가 모여 추모하는 시공간을 꾸리게 되었다. 장례 후 첫 1~2년간은 다들 추모 기도를 드릴 때마다 눈물을 흘렸으나, 이제는 우는 사람도 없으며 다 같이 고기를 구워 먹는 날이 되었다. 그렇게 할머니는 영원히 우리를 떠났다.
내가 본 죽음은 마법과도 같았다. 갈등과, 염려와, 경제 문제가 한순간에 해결되고, 진물이 흐르는 쓰라린 증오가 씻겨지고, 지워지지 않고 웅크리던 사랑이 터져 나오며, 떠나버린 사람이 이야기로 변하는, 하나의 삶이 끊어질 때 발동되는 마법이었다. 하지만 나는 죽음은 무엇이며, 죽기 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해야 하는마법에 걸려버렸다. 마법을 풀기 위해 교회도 가보고 과학도 살펴보았으나, “사는 것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라는 논어의 구절처럼 나는 삶도 잘 모르고, 죽음도 잘 모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마법에 걸린 채로 살기로 했다. 심지어 모르고 사는 것도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모르기에 삶과 죽음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의 죽음이 출발하기 전, 내가 사랑하고,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사랑한다는 말과 글을 남기고 싶다. 그것이 내가 떠나기 전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이야기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