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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여경 Apr 12. 2024

절대주의와 상대주의

꽤 오래전 디자인읽기라는 디자인담론 매체가 있었다. 게시판 하나 달랑있던 사이트였는데, 디자이너들의 의견과 논쟁으로 열기가 뜨거웠던 곳이다. 한때 그곳에서 활동하던 분들과 디자인계 유명 인사 사이에 절대주의와 상대주의 논쟁이 있었다. 다만 그 논쟁은 디자인읽기가 아니라 지콜론이라는 진보적 디자인 매체의 ‘디자인확성기’라는 코너에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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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직접적으로 그 논쟁에 참여하진 못했다. 나름 상대주의 측면에서 의견을 개진할 생각에 내심 내차례가 오길 기다렸지만 논쟁 자체가 흐지부지 끝나버려 내 의견을 낼 기회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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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논쟁을 지켜보면서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엘리트 의식에 좀 놀랐다. 그리고 그 의식이 절대주의에 기반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이미 프랑스 대혁명 시기 무너진줄 알았던 귀족의식이 한국사회 곳곳에 뿌리깊게 박혀 있던 것이다. 나는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확신에 가까운 엘리트 의식이. 다만 신이 유전자로 바뀌었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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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우리 사회는 법치주의가 부상하던 때였다.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이 ‘법’이 되어버린. 한국은 중국의 이사나 한비자가 아주 좋아할만한 사회로 힘차게 나아가고 있었다. 실제로 한비자를 번역해 유명해진 한 저자는 자신의 말이 진리인양 떠들고, 사람들은 그의 말에 주눅들고 있었다. 나도 그의 페친이었는데 너무 편향된 글을 읽기 힘들어 친구를 끊었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궁금해 찾아보니 현 정권의 소극적 추종자가 되어 있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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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 주변 사람들이 많은 소송에 얽혀있다. 법치국가에 걸맞게 참과 거짓, 옳고 그름, 좋고 싫음, 잘함과 못함, 성공과 실패 등 모든 가치 판단을 법에 의존하고 있으며, 때론 법을 교묘히 활용해 상대를 괴롭히는 경우도 많다. 덕분에 법조인들은 아주 노났다. 일도 많고 돈도 벌고 인정도 받고 일석 이조, 삼조, 사조... 나열하자면 끝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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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한국은 법조인들의 나라가 되었다. 대통령도 정당 대표도 모두 법조인이다. 각종 주요 기관의 기관장들도 법조인이 차지했다. 재벌기업은 어떤가 법조인들을 가장 우대하고 대형 로펌은 그 자체로 권력기관이자 재벌이 되었다. 이게 절대주의 사회가 가져온 한국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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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절대주의가 아니라 상대주의를 지향하기에 이런 사회에서 버티기가 어려운 성향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근근히 버티고 있으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그나마 내가 상대주의 가치를 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내 직업이 디자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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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은 아방가르드 즉 전위적 영역이다. 절대적인 어떤 가치는 금방 유행에 뒤처지기에 항상 열린 자세로 변화에 순응해야 한다. 물론 디자인의 특정 영역은 절대적 가치가 잔존하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이 조차 무너지는듯한 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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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때 ‘디자인은 정치다’라는 태도로 글을 썼다. 정치가 갈등과 대화, 타협과 해결의 과정이라면 디자인도 같은 프로세스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만약 절대주의 기준에서 대화와 타협이 있나? 갈등은 무시하고 그냥 닥치고 주어진 규칙과 기준을 따르면 되는거 아닌가?라는 정치적 기준을 가진 사람에게는 디자인은 정치와 다르다. 아니 디자인을 그렇게 하는 사람에게는 정치와 디자인이 같을 수도 있고. 결국 나는 정치던 디자인이던 태도의 문제라고 본다. 절대주의적 태도냐, 상대주의적 태도냐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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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가 끝났다. 법치주의 사회가 절정에 다다른 날이 아닐까 싶다. 과연 결과가 어떻게 될까? 절대주의 가치가 최고조에 다다른 우리 사회에 상대주의라는 틈이 생길까 아니면 더욱 절대주의가 강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갈까... 내 관전 포인트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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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과거 정치학 책을 탐독하면서 정치는 서로 다른 의견을 존중하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배웠다. 여기에 민주주의가 있고, 레토릭이 있고, 은유가 있고, 예술과 디자인이 있다. 과연 이런 가치들이 계속 연명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그런 기회가 올까? 디자인도 정치로 여겨질 수 있을까... 참으로 내일이 궁금한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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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문득 궁금해진다. 10여년전 절대주의와 상대주의 논쟁을 했던 디자이너분들은 그때를 어떻게 회상하고 계실지, 지금은 또 어떤 마음이실지. 그때 그런 논쟁을 담아주는 디자인 매체가 있고 논쟁이 있고 그래서 참 좋았는데... 지금은 이조차 없네... 과연 세상이 진보하고 있긴 하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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