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결혼은 시작도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엄마와 아빠의 결혼생활은 매 순간 삐걱댔다. 그들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자란 나와 오빠는 자연스럽게 '잡음을 만들어내지 않는 착한 자녀'로 자라야 했다. 가끔 나는 스스로 마마걸인가 싶을 만큼 착한 딸 노릇을 빈틈없이 하려고 노력했다.
엄마의 삶
어렸을 때 엄마는 가정주부였다. 돈 한 푼 없는 아빠와 결혼한 엄마는 단칸방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아빠에게 매일매일 생활비를 받으며 겨우 생활했다.
그때 아빠는 꽤 돈을 잘 벌었던 거 같다. 그럼에도 아빠는 엄마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 엄마가 아이들 뭘 사야 한다고 하면 찔끔찔끔 그렇게 돈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내가 기억하는 아빠는 퇴근길에 늘 간식을 사 오는 분이었다. 아빠 퇴근길에는 항상 검은색 비닐봉지가 들려있었기 때문에 아빠 퇴근시간을 손꼽아 기다렸었었다.
내 기억 속 아빠는 그랬지만, 그것이 엄마에게는 고통이었다.
생활비는 전혀 안 주고 퇴근길에 간식을 사 오는 것으로 아빠로서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외벌이로 생활비도 거의 안 주고 아이들 둘을 키우기는 녹녹지 않았다.
엄마는 결혼 전까지 사회생활을 해본 적이 없었다. 성인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집을 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스스로도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어떻게든 아빠가 주는 돈으로 아끼고 또 아끼며 살다 보면 좋은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었다.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추운 겨울 어느 날, 나와 오빠가 울어대던 날이었다고 한다. 수돗물조차 꽁꽁 얼어 세숫물조차 끓여 써야 했던 집에서 엄마는 아마 꽤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 외가는 꽤 부유한 집이다. 그런데 외할아버지도 외할머니에게 돈을 주지 않아 외할머니가 힘들게 사셨던 이야기를 얼핏 들었었다.
엄마는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았을 텐데, 당신의 팔자도 할머니 팔자를 닮았다고 한탄하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여하튼 나와 오빠는 좀처럼 울지 않는 순둥순둥한 아이들이었는데. 그날은 너무 추운 날이었던지 밤새 울어댔다고 한다.
다음날 주인집 아주머니에게 호되게 혼이 난 엄마는 이를 악물고 돈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땐 그런 기억조차 못할 때) 엄마의 말로는 안 해본 부업이 없다고 했다. 별의별 부업을 다 해봐도 돈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엄마의 자린고비 삶은 내가 5살 때, 집을 사면서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내 집이 생겼다는 것에 엄마는 너무 행복했고 여유가 생겼다고 했다.
나는 어릴 적 기억 대부분에서 내 집에서 생활하던 일들이라 그 이전 상황은 잘 모르겠다.
서울에서 집을 갖고 있다는 게 그때는 그렇게 대단한 일인 줄 몰랐겠지만 그때 사둔 집이 재개발이 되고 지금은 그래도 부모님 소중한 보금자리이자 노후자금이 될 줄은 몰랐다.
아빠는 부인을 잘 얻은 게 분명하긴 하다. 암튼, 집을 산 뒤에 삶은 달라졌을 거 같지만 그때부터 나와 오빠를 키우느라 엄마의 악착같은 삶은 더욱 고된 날들의 연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