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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림보 마케터 Feb 15. 2024

무척이나 덤덤한 40대 연애

과거 만났다 헤어졌다 반복했던 남친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와의 대화에서 나는 몹시도 놀랐다. 내 자신에 대해 너무 정확하게 꼬집었기 때문이었다.



도망치는 사람


"너는 극한의 상황에서 도망쳤었어. 나란 사람이 너무도 감당하기 어려운 유형이란 것쯤은 나도 알지만 적어도 난 너에게서 단 한 번도 도망간 적은 없었어."


그는 내게 말했다. "너는 늘 도망친다"라고... 그 말이 가슴에 콕 박혀서 말문이 막혔다. 그렇게 난 40대가 되었고 이젠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싫증을 빨리 내는 사람이다. 직업적으로도 늘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맸고 남자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것이 '폭력 연애'의 상처라고 포장했지만 사실 내가 '도망'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나는 매번 진지한 관계를 거부했고 진지해질 즈음엔 도망쳤다. 누구와도 진지한 관계를 원하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제와 가정을 꾸리고 싶다고 말하면서 나는 정말 도망가지 않는 연애를 하고 있는 것일까. 확신할 수는 없다.  


최근 나의 변화는 무엇이든 끝까지 해보려고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지금 남자친구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내가 나를 바꾸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우리의 첫 만남


나는 6개월 전부터 누군가를 만나고 있다. 그를 처음 본 날은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첫 만남이니 예의를 갖춰야 한다는 생각에 통풍조차 잘 안 되는 연핑크색 원피스를 곱게 차려 입고 땡볕에서 그를 기다렸다.


약속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자 내가 먼저 연락을 해본다. "오늘 만나기로 한 OOO입니다. 그런데 언제쯤 도착하시나요?"


한참을 일찍 도착한 나는 이미 땀 때문에 앞머리가 갈라지고 있었다. 예쁘게 보이겠다고 풀메이크업을 했지만 땀 때문에 생얼의 낯빛이 드러나고 있는 상황.


늦게 도착한 그는 미안해 하며, 나를 이끌고 커피숍에 갔는데. 그곳에 사람이 너무 많아 자리를 겨우 잡고 커피를 받아오기까지도 시간이 꽤 걸렸었다.


커피를 오더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수차례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왔다갔다 하는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이가 꽤 있음에도 마치 30대 초반쯤 돼보이는 착장을 하고 있었다.


특히, 곱게 접어 입은 청바지가 내 눈에 들어왔다. "귀엽네" 동글동글한 얼굴에 곱디고운 손가락으로 커피를 마구 들이키던 그는 커피가 더 이상 남지 않게 된 후로도 한참을 여러가지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엄~청 낯을 가릴 것만 같던 그는 생각보다 수다스럽게 말을 많이 했다.



나는 그에게 반했다


그렇다. 나는 단 한 번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폭력 남친. 그러고 난 뒤 난 누구에게도 이성적 끌림을 받지 못했다. 만나면서 정이 든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설레거나 좋아서 잘 보여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달랐다. 처음 그를 보는데, 빛이 났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넋을 놓고 그를 봤다.


그렇게 멋졌냐고 물으면. 전혀 아니다.


통통하고 둥글둥글한 전형적인 아저씨다. 그런 그에게서 나는 빛을 봤다.


그놈의 빛이 문제였던가. 나와는 정말 너무도 안 맞는 그를 그 첫만남의 후광 덕에 여전히 만나고 있다. 그렇게 난 인생의 두 번째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내가 사랑한 남자들은 하나 같이 순탄하지 않았다. 그 또한 마찬가지다. 빈틈이 전혀 없는 그에게 가까이 가기가 힘들었다.


첫 만남의 모습과는 다르게 세상 누구보다 소심하며 신중하고 진중했다. 속내를 알 수 없어 몇 차례 "그만두자"고 한 건 나였다.


한 번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나를 좋아하긴 하는 거냐" 마치 구걸하듯 물어보는 내 자신이 한심했다. 단 한 번도 남자에게 애태우며 나에 대한 사랑을 확인한 적은 없었다.



완벽한 그에게 틈이 없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정해진 규칙에 따라 사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누군가를 좋아하기도 쉽지 않지만, 한 번 좋아하면 좀처럼 헤어지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사실 그는 흠 잡을 게 없고 내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일절 하지 않는다. 연인들끼리 큰 잘못을 하지 않더라도 소소하게 투닥이게 될 텐데. 투달일 거리가 정말 없다.


내가 이번주에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면, 그즈음 여지 없이 그에게 연락이 와서. "이번주에 OOO를 찾아봤어"라고 말한다.


그가 찾아본 것들이 늘 만족스럽진 않지만, 일하는 중간에 나와의 주말 데이트를 생각하는 듯 보였다.


최근 설 명절에 나는 그의 집에 선물을 보내야 하나 고민했다. 나는 평소 그에게 꼬치꼬치 묻거나 따지지 않기 때문에 그의 가족들이 나와 만나고 있는지조차 잘 알지 못한다.


그런데 내가 고민하던 며칠 사이 그는 내게 뜬금없이 집 주소를 물었다. 이유인즉슨, 우리집에 명절 선물을 보내고 싶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선물을 주고 받았다. 그는 항상 그랬다. 내가 무엇인가를 고민하면 (말하지 않아도) 그 역시 여지없이 그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꾹꾹 참거나 눌러담지 않아도 그가 알아서 나의 상태를 조금씩 알아채곤 했기에 연애 자체에서 불만이나 싸울 일조차 발생하지 않았다.


물론, 나도 사소한 일로 그를 귀찮게 하거나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고 징징대는 일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비슷한 둘이 만나 연애를 하니, 딱히 문제될 일조차 아예 없는 것.



그래서 불안하다.


불안한 심리는 나의 성격에서 비롯되지만, 그와 너무 잘 맞기 때문에. 아니 그를 꼭 잡고 싶기 때문에 나는 좌불안석 하게 된다.


더 다가가면 또 선이 그어져 있고, 또 멀찍이 떨어져 있으면 다시 다가와서 곁에서 웃어주곤 하는 그이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냥 그에게 딸려가고 있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표현하긴 어려울 것도 같다. 사랑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다.


나는 결혼해서 아이를 갖고 싶지만, 그는 여유만만이다. 40대 여성에게서 출산의 문제는 매우 시급한 문제이지만 남자들은 그런 간절함이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더 늦기 전에 빨리 결혼해서 아이를 갖고 사는 게 꿈이지만 나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또한 너무 조급했다가 서로의 삶을 망칠 수도 있기에.


나는 조급한 마음을 다잡고 관조하는 자세로 그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나의 인내심도 한계점이 있으니, 언제까지 관조할 수만은 없을 것이고. 그 언제가 언제일지 상황을 보다가 세월이 흐르고 있는 기분이다.


인생은 끊임없는 고민의 연속이고 그렇기에 인생이겠지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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