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열 시. 현재 기온 29도. 습도 90퍼센트. 마흔 중반이 되도록 아마도 처음인 것 같은 기억 속엔 없는 최고로 무더운 여름을 보내는 중이다. 이 더위 속에서도 꾸역꾸역 운동하겠다며 트레드밀 위에서 한 시간을 꼬박 달리고 나온 참이다.
‘하나도 안 시원하네’
헬스장을 나서면 시원한 바람이 반겨주리라 기대했지만, 시원은커녕 바람 한 점 없는 이 날씨에서는 몸이 식질 않는다. 운동과 더위에 지쳐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니 교차로 횡단보도에 파란불이 깜빡거리며 얼른 건너오라 재촉한다. 지금 뛰면 빨간 불로 바뀌기 전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수 있을 텐데 뛸까? 하지만 고민할 사이도 없이 맥없이 멈춰진 발걸음. 다이어트를 하겠다며 갑작스레 한 시간씩 뛰어대니 내 몸이 내 몸 아닌 듯하다.
신호가 다시 바뀌자, 이번엔 파란불이 의젓하게 기다려준다. 횡단보도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며 강아지와 산책 나온 사람들,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은 채 책가방을 메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 인도에서 어슬렁거리는 서너 명의 무리 사이를 지나 한 블록 안으로 들어섰다. 놀이터를 가로질러 가기 위해서다. 어느 길로 가든 시간 차이는 없지만 이 시간 놀이터는 조용하고 사람이 없어 좁은 인도보다 한결 걷기 편하다.
놀이터를 둘러선 벚나무를 바라보며 잠시 숨을 고른다. 비껴갈 행인도, 짖어대는 강아지도, 깜빡이는 파란 불도 없는 늦은 밤 놀이터. 제법 여유로워진 호흡과 함께 마음도 편해진다.
놀이터 한쪽에 설치된 운동기구 앞을 지나 반대편 입구로 향하는데, 벤치에 앉아 계신 할아버지 한 분이 눈에 들어온다. 며칠째 계속되는 열대야에 지쳐 마실 나오신 걸까.
‘우리 할아버지도 그랬지.’
갑자기 발걸음이 멈춘다. 끈적하고 더운 공기는 나를 저 멀리 기억 속으로 데려간다.
강원도 산골에 자리한 외할아버지댁은 그야말로 드라마 속에나 나올 법한 시골집이었다. 으리으리한 한옥은 아니지만 소박하고 정겨움이 깃든 우리네 옛날 집. 나뭇가지를 나란히 놓아 얽어 만든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ㅁ자형 구조를 가진 집을 만날 수 있다.
왼편엔 살림살이하는 집이, 오른편엔 외양간이 자리하였는데, 자식들이 모두 출가한 뒤 할아버지 내외만 사시기엔 어쩐지 적적한 느낌이다. 대청이라고 하기엔 조금 좁은 마루에 신을 벗고 올라서면 손을 넣어 밀고 당길 수 있는 동그란 손잡이가 달린 방문이 있다.
왼쪽엔 마루보다 한 계단 아래에 자리한 부엌으로 내려가는 문이 있고 그곳엔 아궁이와 가마솥이 있다. 구석엔 풍로라고 부르던 보조 조리 기구도 있었는데 어렴풋한 기억 속엔 주로 보리차를 끓이는 황금색의 양은 주전자가 올려져 있었던 것 같다.
서양식 주택에 익숙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방문을 열고 드나들 때다. 방문도 부엌문도 모두 높이가 낮아 허리를 숙이지 않으면 번번이 이마를 찧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아뿔싸 이마를 찧은 후에 인상을 찡그리며 나오면 지하수를 퍼 올리는 펌프와 외양간이 한눈에 들어온다.
부엌 앞마당에 자리한 펌프는 일곱 살배기 꼬맹이였던 내 힘으로 물을 끌어 올릴 수는 없었지만 언제나 도전정신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두세 마리 소로 꽉 찰 만큼 작은 외양간은 비어있는 날이 많았는데 종종 만나던 송아지를 위해 여물통에 건초를 곱게 놓아두곤 했다. 송아지가 덩치가 크다 한들 어린 내 눈에도 송아지는 아기로 보였던 걸까.
가장 중요한 화장실! 화장실이라기보다 뒷간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는 그곳은 퇴비를 쌓아두어야 하기에 집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야 했다. 가로등이 없어 컴컴한 시골집 뒷간에 갈 때면 달걀귀신이 툭 튀어 나올까 봐 언제나 마음 졸여야 했다. 뒷간을 지나 돌다리로 이어진 작은 시냇물을 건너면 작은 할아버지 댁이 있어 두 할아버지 댁을 오가는 재미가 있었다.
모기가 윙윙거리는 한여름 밤이면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마당 평상에 모여 앉아 찐 옥수수와 과일을 먹으며 더위를 식혔다. 연기로 모기를 쫓기 위해 쑥을 태우고, 아이들은 수박 조각을 들고 뛰어다녔다. 아이들이 다칠세라 조심하라는 어른들의 다정한 잔소리가 쏟아져도 신이 난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멀리서는 더위에 나른해진 개가 컹컹 짖고, 쑥 연기 사이로도 반짝임을 감출 수 없는 별은 하늘 가득했다. 굳이 거창한 대화가 필요할까. 그저 함께 모여 하루를 무사히 보낸 것으로 감사한 것을.
기억 속 가장 행복한 여름밤.
다시 만들어낼 수 없는 그 밤의 풍경.
잊고 사는 듯하다가도 오늘처럼 벤치에 앉아 부채질하는 할아버지를 만날 때면 어김없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