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덕후 비긴즈 1
전에 언뜻 말했었지, 그 검은 코트를 매일 입는다는 사람.
말수는 심하게 적고, 흰머리는 많고, 늘 무표정에 머리 위엔 먹구름이 있는 것 같던 첫 인상.
전에 그 사람이 적은 롤링페이퍼가 너무 감동적이어서 누군가 눈물을 글썽였었다고 했잖아.
수수한 외모에 비해 목소리는 굵고 글은 또렷해서 뭔가 있는 사람 같긴 했는데.
휴, 그래. 지난 출판사 워크샵 때 무슨 일이 있긴 있었던 것 같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 인생에 엄청 큰 일이 일어난 것 같아.
너도 알다시피 지난 일 년은 나에게 질풍노도의 시기였어.
세월호 사건은 우리 모두를 지독히 깊은 잠에서 깨워 주었지.
역사도 정치도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세상은 너무 잘못되어 있는 것 같은데.
가장 아픈 것은 내가 사랑하는 교회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거야.
그 부활절에, 아무렇지 않게 부활절 기념예배를 드리는 교회를 보면서 머리를 세게 맞은 것 같더라.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내가 뭘 해야되는지도 모른 채 우울한 일 년이 흐른 것 같아.
그동안 내 안에 정리된 건, 소위 '빨갱이'라는 말을 들어도 기어이 지금 교회에 반기를 들고 싶어졌다는 거야.
기도만 해서는 안 되겠다고. 사회와 담을 쌓은 채, 대형교회에서 가져온 양육 프로그램에 모든 것을 맡겨 놓아서
몸집만 커졌을 뿐 영양실조에 가까운 이 교회에서 목소리를 내야겠다고 다짐을 했어.
그 와중에 그 사람과의 만남은 나에게 너무 큰 사건이었던 것 같아.
워크샵에서 그 사람의 조수석에 앉게 된 그 순간부터 말이야.
가는 길과 오는 길을 합쳐 네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끊임없는 대화를 나눴어.
가장 웃긴 건, 워크샵에서 돌아오는 길에 나 혼자 서점에 들렀다.
내가 서점이라니. 게다가 그 피곤한 와중에 무거운 배낭을 메고 서점이라니.
그 사람과 이야기했을 때 나왔던 단어들을 겨우겨우 붙잡아 책을 몇 권 샀어.
<칸트의 말>, <자본론 공부> 그리고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이 세 권을 들고 그 길로 스타벅스에 혼자 앉아 책을 읽어 나갔어. 창밖이 어두워질 때까지.
입사하고 9개월, 신입 생활 동안 내 돈으로 책 산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은데.
그 사람과의 대화가 생각 없는 내 마음에 알 수 없는 불을 지펴준 거 같아.
아이고 정신이 없다.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긴 한 거 같지?
지금은 머릿속에 '알고 싶다'라는 생각만 한 가득이다.
말씀을 제대로 알고 싶다. 세상을 제대로 알고 싶다.
그래서 말씀을 잘 해석해내고 싶다. 교회를 건강하게 하고 싶다...
만약 그 분이 나중에 사역을 다시 한다면 난 꼭 그 교회를 섬기고 싶다는 생각도 드네.
너무 많은 단어들이 머리를 휘젓고 있다.
그 사람과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다음에 쓰도록 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