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겨울방학 30일을 밤낮없이 공부하여 J 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과에 지원하게 되었다. 입학시험날 쉬는 시간에 대학에서 축구연습 중인 축구부원들을 부러워하면서 나는 내 안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어보려 애를 썼다. 길었던 필기시험과, 실기시험을 무사히 마치고 마지막 구술면접시험에 총장님이 직접 면접관으로 참석하여 나와 입학서류를 번갈아 보며 하는 말이 “아이들 앞에 서야 하는 사람이 행동발달 사항이 이래서야 되겠나?” 고 하였다.
난 알고 있었다. 내 성적표는 “올 다”라는 사실을. 입학원서와 나를 번갈아 보시던 총장님 왈, “합격시켜 주면 열심히 할 수 있나?”라고, 물으시기에 “넷! 열심히 하겠습니다!”를 주저 없이 외치면서 마음속으로 “이번이 내 인생 마지막 기회입니다, 통촉하소서…”를 되뇌고 있었다.
대학교에 입학한 후 향토 장학금으로 근근이 1학년 2학년을 버티고 3학년 초 ROTC에 지원하였다. 군인이 되기를 기다리며 어렵게 교육을 마치고 난 후, 4학년 임관 신체검사를 받는 과정에서 평발이 문제가 되었다. 평발은 장교의 선발규정에 어긋나 불합격이란다. 평발검사를 제외한 모든 검사를 마치고 수도육군병원 정형외과 과장실에서 몇 시간의 우여곡절의 재검사를 끝으로 결국 통과되었다. 임관고사와 신체검사를 통과한 나는 제 일지망으로 장기복무를 하기 위한 육군헌병 장교를 지원했다. 하지만 학훈단장님 왈 헌병 말고 보병을 가란다, 출세가 빠르다고. 고민이 깊어질 즈음 마침 해병대 사령부 모병과가 주최한 해병대 모병 홍보영화 감상 시간이 있었다. 나는 순간 이동으로 해병이 되었다.
1969년 2월 시골 부모님을 모시고 졸업식과 임관식을 성대히 마치고, 서울역 무임 개찰구 통과를 모친께 보여드리며 진해 해병학교에 입교하였다.
처음부터 다시 인간을 새로 만드는 것 같은 가입교 1개월이 꿈같이 지나고 나자 해군사관학교 동기들이 입소했다. 2월은 추워 3월에 임관하는! 해사 동기들과 정식 입교식을 마치고 웬! 신체검사를 또 한 차례 해야 했다. 또 평발이 문제였다. 너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 얼마 주고 왔느냐? 등의 모멸적인 언사가 난무하는 속에 난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인생의 패배자처럼 명령을 기다리며 왼쪽 가슴에 삼각 환자 표지를 단 열외자로 오전 과업을 보내며 생각했다. 그까짓 것 평발이야 뭐 어쨌다고! 나는 환자표시를 떼고 훈련 대열로 뛰어들어 훈련을 계속했다. 훈련인지 기합인지 모를 온갖 고통을 참으며 그 시간들을 버텨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