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라서 안 되는 게 아니라, 마음이 닿지 않았을 뿐이겠지요.
주말 아침, 책장 한편에서 오래된 DVD 하나를 꺼냈습니다.
1991년작 《분노의 역류(Backdraft)》. 젊은 세대에게는 낯선 제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화염 속에서 생명을 구하는 소방관들의 이야기였지만, 저에게는 단순한 액션 영화 이상의 의미로 남았습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붕괴 위험에 처한 현장에서였습니다. 철골 구조물에 위태롭게 매달린 동생이 형에게 외칩니다.
“형, 나를 놓아. 형까지 위험해.” 그 순간 형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답합니다.
“You go — We go.”
네가 간다면, 나도 간다. 우리는 함께 간다.
그 짧은 대사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제 마음에 남아, 사람을 대하고 관계를 맺는 방식의 나침반이 되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회사에는 친구가 없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정을 나누지 말라고, 가깝게 지내다 상처받기 쉽다고 조언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일은 관계를 복잡하게 만들고, 관계는 때로 마음을 조심스럽게 만드니까요. 하지만 자주 되묻고 싶어 집니다. 정말 친구가 없었던 걸까요, 아니면 우리가 먼저 친구가 되지 못했던 건 아닐까요?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마음을 조금 열고,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며, 어떤 날은 먼저 웃어주는 그 작고 조용한 몸짓들이 서로를 친구로 만들기도 합니다. 다행히 저는 그런 사람들을 곁에 두고 있습니다. 함께 야근을 마치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조용히 한숨을 나누던 사람들, 회의실 문을 나서며 “오늘은 괜찮냐”라고 묻던 사람들, 속상한 하루의 끝에서 “나도 그런 날 있었어”라고 어깨를 토닥여 주던 사람들. 그들은 직장에서 만났지만, 이제는 삶의 한 구간을 함께 걸어가는 친구들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건너가며 신뢰라는 다리를 놓아 온 사람들입니다.
어려운 날들이 있었습니다. 마음이 지쳐 있고, 말 한마디에도 흔들리던 시기. 그럴 때면 친구들이 조용히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찬 바람이 부는 밤, 작은 테이블 위에 놓인 소주잔 두세 개, 별다른 말 없이도 그 자리에 앉아 있어 주는 마음.
그들은 제가 미처 다 털어놓지 못한 속마음까지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았습니다. 제가 힘들어하는 사람을 대신 미워해주고, 제가 좋아하는 사람과는 기꺼이 유대를 맺어주었습니다. 누군가가 저를 곁에서 밀어내려 할 때면 오히려 저를 무리 안으로 단단히 묶어주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함부로 다뤄지지 않을 수 있었고, 조금 덜 상처받으며 이곳에 설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지켜준 조용한 울타리 덕분입니다. 그들은 제 삶의 가장 어두운 밤에도 가장 따뜻한 불빛이 되어주었습니다.
‘You go — We go.’
그 말은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던지는 영웅적 선언이 아닙니다. 홀로 남겨지지 않게 하겠다는 다짐, 어떤 상황에서도 함께하겠다는 조용한 의지, 그저 사람을 사람답게 지켜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저는 그 마음으로 일하고 싶습니다. 성과보다 사람을 먼저 기억하는 태도, 앞서가는 것보다 함께 걷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자세. 그 마음이 언젠가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힘이 되어 돌아올 거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