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서거 80주년 : “부끄러움은 곧,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2집 《Burning Verse》를 만들 때의 일입니다.
한국의 아름다운 명시들을 고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만들었던 밴드의 추억으로 락 사운드로 재해석하는 프로젝트였습니다. (유튜브에서 찾아봐 주시면 “감사합니다~^^“)
타이틀곡을 정하는 과정에서 고민이 있었습니다. 나 자신도 사랑하고, 또 대중들이 가장 사랑하는 한국의 시인과 시는 무엇일까? 고민은 길지는 않았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윤동주 시인의 「서시」 였기 때문입니다.
고요한 저항, 윤동주의 부끄러움
윤동주 시인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속에 또렷이 떠오르는 한 단어, 그것은 다름 아닌 ‘부끄러움’입니다.
이 말은 어쩌면 제 자신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단어이기도 해서, 그가 남긴 시편 속 부끄러움의 감정에 더 깊이 귀 기울이게 됩니다. 윤동주의 부끄러움은 단순한 감상이나 후회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치열한 자기 성찰과 시대에 대한 책임감이 응축된 고결한 감정이었습니다. 그가 시를 통해 품었던 ‘부끄러움’이야말로, 한 인간의 고뇌와 시대의 상처가 맞닿은 가장 순결한 지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면을 비추는 거울, ‘자화상’
그의 시 「자화상」 은 마치 거울처럼 읽는 이의 내면을 비춥니다. 우물 속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윤동주는 자신에 대한 연민과 실망, 애틋함과 미움을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그 모습은 어쩌면 저를 포함한 많은 이들의 내면 풍경과도 닮아 있어, 문장 하나하나가 가슴에 파문을 일으킵니다.
그가 느낀 부끄러움은 세상과 자신 사이에 놓인 거리에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그 거리를 끝없이 되짚고, 또 되묻는 일이 그의 시를 더욱 깊고 진실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대의 그림자 속에서
윤동주 시인은 일제강점기라는 절망의 시기를 살았습니다.
총칼로 저항하던 동지들 사이에서 그는 펜을 들었고, 그 선택 앞에서 느낀 부끄러움은 그를 더욱 깊은 자기 성찰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유학을 위해 ‘히라누마 도주’라는 이름을 써야 했던 현실, 창씨개명으로 지워져 가던 우리 이름들, 조국의 말이 점점 사라져 가는 상황 속에서도 그는 끝까지 ‘시’를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쉽게 쓰여진 시」 에서 그는 고백합니다. “어떤 이는 내 시가 너무 쉽다고 말하지만, 이 시를 쓰기까지 나는 얼마나 많은 밤을 돌아다녔는지 모른다”고. 그의 부끄러움은 회피나 체념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매만지고 채찍질하는 힘이었습니다.
순결한 저항의 빛
윤동주의 부끄러움은 결코 약함의 징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부끄러움을 껴안았기에 그는 시대를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었고, 순결한 영혼으로 어둠을 견디는 고요한 저항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시에는 언제나 조용하지만 강한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크고 요란한 목소리가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에서 비롯된 힘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친구 정병욱의 손에 의해 발간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는 윤동주 시인이 남긴 삶의 흔적이자 그의 부끄러움이 만들어낸 영혼의 지도와도 같습니다.
오늘의 우리에게 묻는 시선
2025년, 윤동주 시인 서거 80주년을 맞이하는 이 해에
그의 시와 삶을 다시금 떠올려 봅니다. 그가 품었던 ‘부끄러움’은 과거에 머물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크고 작은 문제들 속에서도, 그의 시선은 여전히 살아 숨 쉬며 우리를 향해 묻고 있습니다.
“너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가?”
“너는 너 자신에게, 그리고 시대에 부끄럽지 않은가?”
저 역시 그 물음 앞에서 조용히 고개를 숙입니다.
완전할 수 없지만, 완전함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인간의 길이라면 윤동주 시인의 부끄러움은 그 길을 밝혀주는 가장 순한 등불일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