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안에서, 청춘을 만나다
뉴진스를 좋아합니다. 무대 위를 자유롭게 누비며 춤추는 그들을 보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집니다. 싱그럽고 당당한 에너지, 꾸밈없는 감정, 무심한 듯 멋스러운 몸짓까지—그 모습은 요즘 시대 청춘이 얼마나 자유롭고 반짝이는지를 단박에 보여줍니다. 그렇게 뉴진스를 보다 보면, 문득 제 스무 살이 떠오릅니다. 지금 그들과 비슷한 나이였던 그때, 여름이 무르익던 어느 날. 그리고 그 시절, 청춘의 상징처럼 제 곁에 함께였던 이름—듀스.
그들은 단순한 인기 그룹이 아니었습니다. 나의 간지였고, 자유였고, 가능성이었습니다. 지금도 여름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그 노래, 〈여름 안에서〉는 그저 유행가가 아니라, 청춘이라는 계절 자체였습니다.
처음, 그리고 빠져들다
중학생이던 어느 여름 저녁, 텔레비전에서 〈가요톱텐〉을 보던 제 눈앞에 낯선 두 남자가 등장했습니다. 듀스라는 이름도, 그들의 얼굴도 그날 처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음악이 흐르는 순간, 마법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화면 너머의 공기가 달라졌고, 몸짓은 리듬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렀습니다. 화려하지만 과장되지 않았고, 강렬하면서도 담백했습니다. 연필을 든 손도, 리모컨도 멈췄고, 가슴이 콩콩 뛰기 시작했습니다. 미소가 절로 번졌습니다. 그날의 옷차림도, 춤 동작도 흐릿하지만, “저기 정말 멋진 세계가 있구나”라는 직감만큼은 아직도 놀랍도록 생생합니다. 그날 이후, 용돈을 모아 테이프를 샀고, 가사를 공책에 베껴 적으며, 친구들과 동작을 따라 했습니다. 처음으로 ‘누군가의 음악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감정을 배운 여름이었고, 그렇게 나의 청춘은 반짝이며 문을 열었습니다.
김성재, 시대를 앞서간 아이콘
김성재는 단지 잘생긴 스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멋짐’이라는 단어 자체를 새롭게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오버사이즈 재킷, 버기 팬츠, 모자와 선글라스. 그의 스타일은 마치 미래에서 온 청춘 같았고,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습니다. 그의 움직임은 부드럽고 유려하면서도 생기가 넘쳤습니다. 무대 위의 그는 마치 “나는 이런 사람이야!” 하고 웃으며 말하는 듯했습니다. 스스로를 꾸밈없이 드러내는 그 모습에서, 청춘의 찬란함이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지금 다시 보아도 그는 전혀 촌스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세련되고, 더 자유롭습니다. ‘다름’을 주저하던 시대에 그는 ‘달라서 멋진’ 삶을 당당히 증명했습니다. 저는 그를 통해 개성이란 감추는 것이 아니라, 밝히고 즐기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이현도, 청춘의 사운드를 짓다
이현도는 음악으로 꿈을 짓는 사람이었습니다. 뉴잭스윙, 힙합, R&B—그는 낯선 리듬을 들여와 한국 청춘의 감성에 꼭 맞게 다듬었습니다. 단순한 흉내가 아니라, 우리만의 소리로 만들어낸 연금술이었습니다. 〈여름 안에서〉의 첫 박자를 기억하시나요? 공기를 환하게 바꾸고, 마음을 설레게 만드는 그 순간. 이현도의 음악은 단순한 장르의 모방이 아니라, 청춘의 감정을 리듬에 담아 전하는 예술이었습니다. 그 싱그러운 감각은 지금도 K-POP의 뿌리에서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그가 만든 사운드는 청춘의 배경음악이 되었고, 그 안에는 젊음을 향한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무엇이 마음을 뛰게 하고, 어떤 비트가 에너지를 빛나게 하는지를 그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여름 안에서〉, 청춘의 사운드트랙
이 노래는 단순한 여름 노래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웃고, 사랑하고, 꿈꾸던 시절—그 모든 장면에 자연스럽게 깔려 있던 청춘의 사운드트랙이었습니다. 부산 서면 노래방에서 친구들과 목청껏 불렀던 멜로디, 하굣길 버스 창밖으로 보이던 해운대 바다와 어울리던 리듬, 여름밤 지금의 아내와 이어폰을 나눠 끼며 듣던 순간까지. 반짝이는 기억들은 늘 그 노래와 함께였습니다. 듀스의 무대는 선언 같았습니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아. 아니, 이렇게 사는 게 제일 멋져!” 이현도의 비트, 김성재의 몸짓—그 자체로 청춘이었습니다. 그들이 전해준 메시지는 분명했습니다. 남과 다름을 두려워하지 말 것, 자기 색깔을 숨기지 말 것. 저는 그 삶의 태도에 반했고, 그 용기에 오래도록 불이 붙었습니다.
끝나지 않은 청춘의 이름
듀스의 활동은 짧았습니다. ‘발전적 해체’라는 말 이후, 김성재의 비보는 제 청춘의 일부를 데려가버린 듯했습니다. 하지만 진짜 청춘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음악은 여전히 생생히 살아 있고, 그 밝은 에너지와 자유의 메시지는 오늘의 젊은 아티스트들에게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아이들과 〈여름 안에서〉를 듣습니다. 그 반짝이는 눈빛을 보며 다시 청춘을 봅니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설레는 마음, 음악에 대한 순수한 사랑, 그리고 세상을 나답게 마주하는 용기. 그것이 듀스가 남겨준 가장 빛나는 선물이었습니다.
여름이 오면, 나는 다시 청춘이 됩니다
뉴진스가 오늘의 청춘을 노래하듯, 듀스는 제 청춘을 소환합니다. 그 흐름을 따라 시간을 건너면, 어느새 저는 스무 살이던 그 여름과 마주하게 됩니다. 〈여름 안에서〉를 듣는 지금 이 순간, 갓 스물이 된 시선과 오십이 멀지 않은 마음이 겹쳐지고, 그 접점에서 새로운 감정이 피어납니다. 청춘은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더 뜨겁게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듀스는 제게 말해주었습니다. 젊음을 사랑해도 된다고, 자기답게 살아도 괜찮다고, 그렇게 사는 게 최고 간지라고. 그들의 메시지는 조금도 바래지 않았습니다.
올여름, 저는 또다시 〈여름 안에서〉를 듣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청춘이 됩니다. 나이는 숫자일 뿐이고, 진짜 청춘은 지금 내 마음속에서 여전히 반짝이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