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안경은 좋은 것들을 보여줄 거야
처음 안경 썼던 날을,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눈앞이 맑아지는 순간, 세상은 한 톤 밝아졌습니다.
멀리 있던 간판이 또렷하게 다가왔고, 친구의 표정도 선명하게 읽혔죠.
아무것도 변한 건 없는데, 모든 게 새롭게 보였던 날.
지금으로부터 36년 전, 제 첫 안경의 기억입니다.
제 첫 안경은 얇은 금속테에 작고 둥근 렌즈가 달린, 어른용 안경을 줄여놓은 듯한 모양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아이들 전용 디자인이 따로 없던 시절이라, 그 나잇대 친구들 대부분이 비슷한 안경을 썼습니다.
투명한 고무 코받침은 금세 누렇게 변했고, 귀 뒤를 눌러오던 가느다란 다리는 종일 거슬렸지만 그건 별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선명해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모든 불편이 기꺼웠습니다.
그날 이후, 안경은 제 삶에서 빠질 수 없는 물건이 되었습니다.
이따금 거울을 보다 안경을 벗으면, 왠지 얼굴이 텅 빈 듯한 느낌 조차 듭니다.
옷은 아내가 골라주는 걸 입고, 신발은 형님이 매년 생일마다 사주는 걸 신지만,
안경만큼은 꼭 제가 직접 고릅니다.
매일 얼굴 위에 얹고, 세상을 마주하는 첫 관문이니까요.
그만큼은 제 취향과 감각이 솔직하게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크게 꾸미는 걸 즐기는 편은 아닙니다.
깔끔하게만 입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옷도 신발도 대체로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지냅니다.
그런데 안경만큼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얼굴 한가운데 오래 머무는 물건이니, 그만큼은 저를 가장 많이 닮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제가 어떤 사람인지 말 대신 보여주는 도구 같기도 하고요.
자연스럽게 손이 가는 건 뿔테입니다.
제 얼굴형과 가장 잘 어울린다고 일찌감치 생각했고,
그 이후로는 굵기나 색만 조금씩 달리하며 줄곧 뿔테를 써왔습니다.
강한 인상을 주고 싶을 땐 검정색, 부드러운 인상을 원할 땐 브라운 계열을 고릅니다.
안경 하나 바꿨을 뿐인데, 거울 속 표정이 다르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애용하는 브랜드는 모스콧과 젠틀몬스터입니다.
모스콧은 꾸밈이 없으면서도 단단한 멋이 있습니다.
고집스럽지 않게 클래식하고, 조용하지만 분명한 인상을 남기죠.
하루 종일 쓰고 있어도 편안한 무게감도 마음에 듭니다.
젠틀몬스터는 이름부터 매력적입니다.
부드러움과 강인함이 함께 느껴지는, 어딘가 모순적인 조화.
그 안에 담긴 긴장감이 저를 닮은 것 같아 끌렸습니다.
국내에서 시작해 세계로 뻗어 나간 브랜드라는 점도 은근히 자랑스럽습니다.
안경은 결국 얼굴 위에 머무는 물건이니까, 기능만큼이나 감정도 중요해집니다.
잘 보이는 것 이상으로, 잘 느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안경 하나 바꿨을 뿐인데, “인상이 달라졌다”는 말을 듣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새삼 느낍니다.
안경이 얼굴을 만들고, 표정을 바꾸고, 심지어 나의 기분까지 살짝 움직일 수 있다는 걸요.
그건 아주 작은 변화지만, 꽤 분명한 변화이기도 합니다.
마음이 흐트러질 때 새 안경을 하나 맞추면 기분이 다 잡히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거울을 볼 때마다 ‘오늘의 나’가 조금 더 또렷해 보이니까요.
요즘 들어 눈이 부쩍 불편해졌습니다.
문자를 볼 때마다 안경을 위로 밀어 올리고, 책을 읽을 땐 자꾸 팔을 뻗게 됩니다.
처음엔 왜 이러지 싶었는데—노안이 온 거였습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괜찮다고, 그럴 나이는 아니라고 애써 부정했습니다.
하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어색한 자세로 안경을 만지작거리는 자신을 보며 이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구나 싶었습니다. 불편했고, 솔직히 말해 서글펐습니다.
결국엔 위로하는 마음으로, 평소라면 고르지 않았을 제 인생 가장 비싸고 화려한 안경테를 골랐습니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묵묵히 제 시선을 감당해 온 두 눈에게 건네는 작은 선물이었습니다.
안경은 단순히 시력을 보정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어떤 날엔 인상을 조율하고, 또 어떤 날엔 기분을 환기시킵니다.
출근길엔 샤프한 뿔테로 단정함을 더하고, 주말엔 부드러운 색감으로 여유를 입힙니다.
새로운 테 하나만으로도 기분이 달라지는 날이 있습니다.
그 변화는 타인이 알아차리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건 내가 내 얼굴에 어떤 선을 얹느냐는 것이니까요.
클라크 켄트가 안경을 벗으면 슈퍼맨이 되듯, 안경 하나로도 우리는 스스로를 새롭게 느낄 수 있습니다.
어릴 적 그 변신 장면이 신기했는데, 지금도 가끔 안경을 바꿀 때면 살짝 다른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듭니다.
변한 건 테 하나뿐인데, 마음가짐까지 달라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래서 안경을 고를 때면 늘 신중해집니다. 브랜드도, 컬러도, 착용감도 중요하지만 결국 그 테가 내 얼굴 위에서 어떤 조화를 이루는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안경은 세상을 보는 창이자, 내가 세상과 마주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프레임이니까요.
누군가에게는 시계나 구두가 그런 물건일 테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자동차나 가방이 그러하겠죠.
저에게는 안경이 그렇습니다.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묵묵히 저를 닮아온 물건.
그래서 안경만큼은 꼭 좋은 걸 씁니다. 매일 마주하는 세상이니만큼, 그것을 보는 도구도 좋아야 하니까요.
한 달 벌어 한 달 사는 삶 속에서도, 가끔은 스스로를 위해 무언가 좋은 것을 고르고 싶어 집니다.
남자에게 안경은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가장 확실한 변화를 줄 수 있는 매력적인 선택지라는 생각입니다.
시계는 부담스럽고 옷은 조합이 어렵더라도, 안경 하나만 바꿔도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안경을 고릅니다. 조용히, 그리고 정성스럽게.
제 삶에 가장 가까이 있어온 이 물건을 앞으로도 오래 곁에 두기 위해.
안경이 있어 저는 세상을 조금 더 또렷하게 보고, 더 많은 좋은 것들을 선명히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