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리뷰
가끔 삶이 끝없이 가라앉는 수렁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꺼내 보는 영화가 있습니다.
제목부터 잔인한〈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입니다.
2007년 개봉 당시 극장 관람을 놓쳤지만,
이번달 재개봉 소식이 있어 설레이는 마음으로 극장을 다녀 왔습니다.
이 영화는 차마 감당하기 힘든 비극을 화려한 색채와 노래로 감싸 안으며,
이상하게도 절망 속에서 웃음을 터뜨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영화를 "유쾌한 불행 포르노"라 부르지만,
저에게는 그 아이러니가 오히려 묘한 위로가 되었습니다.
사랑받고 싶었던 소녀, 끝내 사랑을 놓지 못한 여인
마츠코의 삶은 단 하나의 욕망으로 정의됩니다. '사랑받고 싶다.'
병약한 동생에게만 마음을 주던 아버지 앞에서, 그녀가 인정받은 순간은
오직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흉내 내 아버지를 웃게 했을 때뿐이었습니다.
그 기억은 평생 그녀를 따라다녔습니다. 성인이 되어 교사가 되었을 때도, 집을 나온 후에도,
마츠코의 선택은 언제나 사랑을 향해 있었습니다.
천재 작가, 유부남, 야쿠자, 심지어 제자까지. 그녀가 만난 남자들은 폭력적이거나 이기적이었고,
끝내 그녀를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마츠코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괜찮아, 맞는 게 외톨이가 되는 것보다는 나아.”
이 대사는 어리석음을 넘어, 인간의 가장 연약한 진실을 드러냅니다.
혼자가 되는 공포. 사랑받지 못하는 두려움.
그녀는 끝내 그것에 굴복했지만, 동시에 그것 때문에 누구보다 치열하게 사랑했습니다.
화려한 불행, 아이러니의 미학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또 다른 힘은 연출의 과잉에서 나옵니다.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은 이 비극을 뮤지컬처럼 펼쳐냅니다.
행복할 때는 꽃이 피어나고, 절망할 때는 쓰레기봉투가 까마귀로 변합니다.
교도소는 뮤지컬 무대가 되고, 네온사인 아래 창녀가 된 마츠코는 춤을 춥니다.
이 과잉은 단순한 장식이 아닙니다. 만약 화려한 껍질이 없었다면,
관객은 두 시간 넘게 이어지는 불행을 끝까지 감당하지 못했을 겁니다.
노래와 색채는 관객의 심장을 지켜주면서도, 동시에 더 깊은 상처를 새겨 넣습니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눈은 즐겁지만, 가슴이 저며오는 영화입니다.
“혐오스러운 건 그녀가 아니라 세상이다”
마츠코는 결국 홀로 쓰레기에 파묻혀 살다, 동네 불량 청소년들이 휘두른
야구방망이에 맞아 허망하게 생을 마감합니다.
너무도 초라한 최후. 그러나 그녀의 삶을 따라간 조카 쇼는 결론에 이릅니다.
혐오스러운 건 마츠코가 아니라, 그녀를 짓밟은 세상이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영화는 그녀의 마지막 순간에 관객을 데려갑니다.
쓰러진 자리에서 삶은 끝났지만, 노래는 이어집니다. 마츠코는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수많은 상처를 남겼지만, 동시에 수많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인생의 가치는 다른 사람에게 뭘 받았는지가 아니라, 뭘 주었는가로 정해지는 거야.”
그녀의 삶은 끊임없이 버림받았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사랑을 주는 행위로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삶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돌아갈 집을 향한 긴 여행
마츠코는 평생 “오카에리(어서 와)”라는 인사를 기다렸습니다.
친구 집 문 앞에서 들려온 그 말 한마디가,
자신에게는 결코 돌아갈 집이 없다는 사실을 잔인하게 일깨웠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 “타다이마(다녀왔어)”와 “오카에리(어서 와)”는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귀환의 의식이라고 들었습니다. 세상이라는 전쟁터에서 돌아온 자신을 받아주는 확인.
마츠코는 죽음 이후에야 듣습니다.
“다녀왔어.”
“응, 어서 와.”
이미 세상을 떠난 동생이 건네는 마지막 인사. 그녀의 끝없는 방황은 그렇게 멈춥니다.
오늘날 대중문화는 성공담을 찬미합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정반대의 길을 갑니다.
추락한 인생을 향해 말합니다. 괜찮다고, 그것도 삶이라고.
마츠코는 벽에 “태어나서 죄송합니다”를 수없이 새겼지만, 영화는 결국 그 문장을 뒤집습니다.
영화 말미의 “어서 와”는 절망의 기록 위에 따뜻한 귀환의 서명을 남깁니다.
맺으며 — 함부로 혐오할 수 없는 삶
찰리 채플린은 말했습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
마츠코의 일생이 바로 그렇습니다. 가까이서 보면 끝없는 추락이었지만, 멀리서 보면 눈부신 악극이었습니다.
마츠코의 남동생은 누나의 인생을 “시시하다”고 했지만, 조카 쇼는 마지막에 묻습니다.
“누가 감히 마츠코를 혐오스럽다고 할 수 있나?”
저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그 질문을 제 삶에 돌려봅니다.
때로는 제 하루도 시시하고 실패투성이 같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웃고, 사랑하고,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을 수 있다면 ― 그 또한 존엄한 삶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