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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나 Sep 18. 2022

그녀에게 보내는 술 한 잔

더 이상 고주망태가 되지 않는다는 글친구 작가님이 쓴 술 이야기를 읽고 술과 나를 생각해보던 날이 때마침 술이 땡기는 그날이었다.


언제부터였지? 술을 마구 들이켜게 된 것이. 아무래도 시작은 대학생 때였던 것 같다. 지식과 탐구로 가득 찼어야 할 대학생활에서 의외로 술이 더 큰 부분을 차지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절대 해소가 아니었지만 당시엔 정신적 긴장을 해소할 방법으로 파티와 술을 선택했다. 밖으로 내보일 수 없는 내 소심함을 커버하기엔 술이라는 가면만큼 편리한 것이 없었으니.


독일 대학에 입학하고 첫 학기, 여전히 듣고 말하는 것이 어려웠을 때였다. 학교 기숙사에서 같이 살던 독일인 친구가 자기 부모님 집 바비큐에 날 초대했다. 파티엔 그 친구의 부모님, 동생, 그리고 동네에서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오랜 친구들까지 와 있었다. 그 시골 동네에 온 외국인은 내가 처음이라며 내게 '너는 특별해'라는 기분 좋은 감정을 심어주고선 바비큐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었다.


처음엔 나를 배려해 영어로 이야기해주던 사람들은 시간이 좀 지나자 독일어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농담도, 진중한 이야기도, 뭐든 독일어뿐이었고, 한 문장이 끝날 때마다 통역해주길 기대할 수 없는 나는 곧 꿀 먹은 벙어리처럼 식탁 위 애꿎은 접시들만 바라볼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나는 대화에 끼지 못했고, 그 어색함을 이기려고 술을 들이부었다. 술은 대화를 하지 않고도 내가 그들과 같은 테이블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훗날 들으니 친구는 '이 친구는 술을 정말 좋아하는구나.'라고 생각하고 내가 술만 마시게 내버려 뒀단다.


몇 년 후 나의 두 번째 공부가 끝나갈 무렵, 나는 학교에서 나와 너무나 코드가 잘 맞는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나보다 무려 8살이나 어린 친구였다. 아시안이지만 어릴 때부터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자란 그 친구의 자유분방함에 기대어, 집시처럼 살고 싶었던 나도 영혼을 활활 불태웠다.


우리는 마치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매일 파티를 휩쓸고 다녔다. 술은 당연히 많이 마셨고, 가끔은 병원에서 깨어나기도 했다. 한 번은 깨어난 후 내 상태를 확인하러 온 의사가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난 우리가 다시 여기서 만나는 일이 없길 바랍니다." 그날은 응급실이 아니라 중독자들을 치료하는 정신 병동에서 깨어났다. 벨트, 머리핀, 스카프(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를 다 빼서 따로 보관하고 있다가, 보호자가 데리러 온다고 퇴원하겠다고 했더니 그제야 돌려주는, 복도에도 창살이 많이 달린 그런 곳이었다. 내 옆 침대의 아주머니가 블루베리 케이크를 먹으라는 말을 계속 반복했던 것만 어렴풋이 기억난다. 이후엔 병원에서 깨어날 정도로 마신 적은 없다.


질리지도 않고 이어가던 파티는 내가 영국으로 이사를 가면서 뜸해졌다. 런던에는 파티가 훨씬 많았지만, 그 친구가 없이는 왠지 음악도 술도 권태로웠으니까. 그래도 계속 마시던 술을 그 친구가 세상을 떠나고서는 거의 끊다시피 했다. 술, 약, 어두움. 잠시 길을 잃은 것이라고만 생각하던 사이 친구를 아예 잃어버렸다. 


우리는 세상에 분노하기라도 했던 걸까. 두려웠던 걸까. 외로웠던 것일까. 막막했던 걸까. 무엇을 그리 술로 숨기려 했는지, 이제는 모르겠다.


인정하기 싫은 마음에 지우지 못한 그 친구의 핸드폰 번호는 그 사이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다. 그 친구가 떠나던 날도 이렇게 푹푹 찌는 무더운 날이었는데. 한동안 안 마시던 술이 갑자기 이렇게 생각나는 것은, 아마도 이제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시원하게 술 한 잔 따라놓는 것 밖에 없기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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