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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나 Feb 03. 2022

오리 저금통

 어렸을 때 우리 집엔 색깔도 모양도 각각인 돼지들이 여럿 있었다. 안방 선반 곳곳에 자리를 차지한 들에겐 동료들도 있었다. 같은 역할을 나눠서 했던, 뚜껑을 돌려서 여는 적당한 크기의 플라스틱 통 같은 것 말이다. 내 나이 몇 살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학교에서 배웠던, 부자가 되는 기본은 "티끌모아 태산"이었고 그걸 실천한다며 누구나 돼지저금통에 동전을 모으던 때였다.


 난 어릴 때부터 부자 될 재목은 아니었나 보다. 그 기본은 완전히 무시해버렸고 저금통을 향한 내 관심은 간사함에서 비롯되었으니. 잔꾀로 똘똘 뭉친 나의 시선은 항상 돼지들을 주시했고 배가 불러올 때를 기다렸다. 이제 보니 제대로 기다릴 줄 아는 나는 천상 사냥꾼이었구나.


 적당히 묵직해졌다 싶으면 그걸 거꾸로 들고 위아래로 세차게 흔들었다. 물론 엄마 아빠가 집에 없을 때에만 말이다. 그럼 동전이 한 개씩 짤랑짤랑. 100원짜리가 나올 때와 500원짜리가 나올 때, 희비가 엇갈리는 그 순간은 대입 결과 발표 때와 견줄만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10원짜리가 떨어졌을 때의 실망감이란.


 저축을 하면 평소 사고 싶었던 장난감을 산다거나 군것질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꽤나 열심이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저금통이 꽉 차도록 동전을 모은 적은 없었다. 그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으니까.  앞을 지날 때 내 코를 향해 손짓하던 떡볶이와 순대 냄새는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중독성 강했고, 얄궂은 장난감은 사도 사도 모자랐다.


 엄마 아빠 몰래 돼지 저금통에서 돈을 빼내는 기술은 날이 발전했다. 나중엔 마구 흔들어대는 것이 아니라 요령을 터득해 내부의 동전을 슬슬 움직인 후 500원짜리가 나올만할 때에 탁 쳐서 떨어뜨리곤 했다.


 시작은 우연히 흔들다가 빠져나온 동전이었지만, 그 결과가 맛있는 떡볶이라는 건 다시금 저금통을 흔들게 만드는 동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500원짜리 동전이 많이 모일 때까지 저금통을 탈탈 털다 보면 그 끝은 으레 산더미같이 쌓인 동전이었다. 그러다 불현듯 전해져 오는 깃털 같은 가벼움에 이내 머쓱해져서 동전을 다시 집어넣었다. 갑자기 너무 가벼워지면 티가 나서 엄마 아빠가 알게 될 테니. 그렇게 연막을 치고 야금야금 꺼내 쓰던 비상금의 저장고, 어린 나에겐 램프의 지니 같았던 돼지 저금통. 그렇게 우리 집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있던 녀석들이 시간이 갈수록 슬며시 사라지더니, 언제부턴가는 그것이 존재했었다는 기억조차 사라졌다.


 얼마 전 동네 시장 거리를 걷다가 저금통일 것 같은 물건들이 쌓여 있는 것을 보고 가게에 들어갔다. 찾던 물건도 아니고, 대부분 카드로 계산하는 요즘 시대에 그다지 쓸만할 것 같지는 않지만 왠지 집에 저금통 하나쯤은 있어야 할 것 같아 귀여운 놈으로 골랐다. 내 기억 속의 돼지저금통보다 훨씬 예쁘다.


 우리 집에 데려온 저금통은 개구리 옷을 껴 입은 초록색 오리 모양이다. 괜히 기분이 좋아져 헤벌쭉 거리다가 지갑을 열었다. 시장에서 현금으로 계산하고 거스름돈으로 받은 동전들이 몇 남아있었다. 오리 저금통에 톡톡 동전들을 밀어 넣는데 지나간 시간의 무게가 함께 떨어진다. 엄마 아빠가 저금통에 넣어 놓은 동전을 몰래 빼서 쓰던 내가 이젠 저금통에 동전을 채워 넣는 사람이 되었구나. 곧 내 아이들이 이 저금통에서 동전을 빼 간식을 사 먹으러 다닐지도 모르겠다. 저금통에서 순환의 고리와 마주친다.


 아이들 간식값 하려면 자잘한 동전으론 부족할 텐데. 10달러짜리도 종종 채워 넣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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