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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나 Sep 17. 2022

여왕을 떠나보내며

엘리자베스 여왕이 서거했다. 밤에 축구를 보던 날이었다. 아스널이 스위스에서 경기하는 것을 보는데 모바일 폰 뉴스에 긴급 보도가 떴다. 티비 채널을 BBC 뉴스로 바꿔보니 뉴스 진행자와 특파원 모두 검은색 옷을 입고 심각하게 방송을 진행 중이었다. 검색해보니 여왕이 위독해 가족들이 모이고 있다면서 BBC는 잠정적으로 여러 방송 프로그램들을 중단시켰다. 이번엔 회복될 컨디션이 아니구나 싶었다. 남편은 이미 왕실의 프로토콜이 시작된 것 같다며 여왕의 서거를 거의 확실시 여기는 듯했다. 설마 이렇게 갑자기? 하지만 이미 내부에선 뭔가 이야기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BBC 뉴스를 마침 축구 하프타임에 봤는데, 후반전에 등장하는 아스널 선수들은 이미 팔에 검은색 완장을 차고 등장했다. 이런 걸 미리 준비한 거라면, 여왕의 상태는 언제 가도 이상하지 않았을 만큼, 이전부터 좋지 않았을지도. 그럴 만도 하다, 여왕의 나이는 96세였으니까.


여왕의 나이가 90이 넘었을 때에도 매체에서 보이는 그는 신기하리만치 생기 넘쳤다. 그런 모습을 오랫동안 봐왔기에 그가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았다. 96년이란 세월을 살며 세계대전을 비롯해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을 직접 경험하고, 내가 역사책이나 사진전에서 보던 그런 시대에서 지금 이 시대가 되기까지의 변화를 목격한 역사의 증인 한 명이 이렇게 갑작스레 떠나다니.


내가 영국 시민권을 취득했을 때(영국이 좋아서 선택한 것은 아니다.)의 선서는 여왕과 왕실에 충성을 맹세하는 내용이었지만 이젠 여왕 대신 왕과 왕실에 대한 충성으로 바뀌었다. 영국의 국가도 God save the Queen에서 God save the King이 될 테고. 어쩌면 여왕이 존재했던 시대에 살았다는 것이 특별한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 다음 왕위 계승 순위를 보면 여왕이 즉위할 확률은 낮다. 런던에 살 때 친구들과 샴페인을 마실 때면 여왕 피겨를 가져다 놓고 "우리의 누추한 파티에 참석해줘서 고마워요."라며 장난을 치곤 했었는데, 왕의 피겨는 어째서인지 우리의 파티에 초대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런저런 스캔들이 많은 왕실이지만 여왕은 대체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로열 가든파티에 종종 초대되었던 내 대학원 동기(그는 민주주의와 자유의 땅 미국 출신이라 이 시대 왕실의 존재 이유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이다)도 그 행사에 참석하는 유일한 이유로 여왕을 꼽을 정도였다. 여왕의 서거 소식에 왕실의 팬이 아닌 나도 어색한 허전함을 느끼는데, 왕실과 여왕의 팬이었다면 상실감이 상당할 것 같다.


놀랍게도 슬퍼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은 여기, 홍콩이다.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였지만 영국을 향한 사랑이 해바라기같이 한결같다. 여왕 서거 후 영사관 앞에 수북이 쌓인 꽃과 편지, 카드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심지어 오늘은 영국 밖에서는 가장 큰 애도의 물결일 것이라며 BBC 뉴스를 장식하기도 했다. 아이가 자라면 꼭 영국의 식민지였던 홍콩 역사를 알려줄 것이라며, 아기를 유니온 잭 깃발로 감싸고 인터뷰를 한 홍콩인 아빠를 보는 나의 느낌은 혼란스럽다. 인생의 반을 외국에서 보냈어도 어릴 때 한국에서 받은 민족주의 아이덴티티 스타일의  교육이 아직 영향을 발휘하나 보다. 다른 나라의 식민통치를 받았던 역사가 있는 나라 출신인 나로서는 식민지 시절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어쨌든, 영국 식민지 시절을 홍콩의 황금기로 여기고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은 덕에, 나는 지금 영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지만 여왕을 애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여왕을 떠나보낼 수 있었다. 70년이란 시간을 공무를 수행하며 살았던, 영국의 상징, R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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