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평화롭고 지루하다
병가를 마치고
작년 말에 갑자기 찾아온 불운으로 인생 최악의 질병을 올 초 2월쯤 극복했다.
정말 안 좋은 상태까지 갔던 것을 감안하면 난 그림도 그리고 요리도 하고 아주 가끔 사람도 만나고 그 나름의 시간을 즐겼다. 참 내 심리 상태가 안정적이었고 강했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다시 한국을 떠나오니 사실은 마음이 참 약해졌었음을 여실히 깨달았다.
아직도 부모님 집을 떠나 다시 나의 집에서 잠을 청하던 복귀 후 그 첫날밤이 생생히 떠오른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내가 거기 혼자 있는지 알 수 없었고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만 가득했으며 잠이 오지 않고 눈물만 흘렀다.
결혼 병
아플 때 한 가지 들었던 생각은 나만의 가족(남편)이 있긴 있어야겠다는 것이었다.
남에게 신세 지는 걸 잘 못하는 내 성격상, 구조 요청을 해야 될지도 모르는 불안감에 시달리면서도
그 주변 친구들에게 조차 마음을 터놓지도 도움 요청을 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 가족이라면 내가 좀 더 마음도 터놓고 의지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 때문에,
그땐 "나 다 나으면 나 좋다는 사람이면 그냥 바로 결혼할 거야" 하는 결심까지 했었다.
마침 병가를 마치고 나니 정말 괜찮은 사람을 소개받는 기회가 있었다.
모든 조건이 참 완벽했던 사람, 하지만 그 어떤 끌림도 없었던 사람.
나는 내 욕심에, 시간을 좀 지내다 보면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몇 개월이나 시간을 허비했다.
그 사람을 만나는 게 스트레스인 지경까지 오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사랑해서 결혼하는 게 역사가 얼마나 되었다고.
시간은 흐르고 자연스레 사랑도 찾아왔지만
당장 한국에 가고 싶었던 마음에, 한국 회사와 인터뷰도 보고 그랬지만
"지금 마음이 일시적으로 약해져서 그래. 꾹 참고 이 개월만 더 버텨보자. 그러면 진짜 진심이 보이게 될 거야"라는 마음으로 버텼다.
난 그때 한 달 뒤도 보기가 어려웠다. 그냥 일주일 일주일을 버틴다는 생각으로.
누군가 너 언제까지 거기 있을 거야?라고 물어보면... "글쎄. 잘 모르겠어. 한 달 더 여기 있겠다는 생각도 너무 힘들어 지금은. 그냥 다음 주까지는 있을 거야"라고 대답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정말 적응이 무언지., 한 달이 지나니 버틸만했고 두 달이 지나니 아무 생각이 안 났으며
세 달이 지나니 그냥 평온해졌다.
그 사이 나는 일에 조금 전념했고, 직장에서 친해진 소규모 무리도 생겼다.
그렇게 그 무리와 술 마시고 춤추고 수다 떨고 많은 시간을 보내다 보니,
그 안에 자연스럽게 좋아하는 사람도 생겼고
좋아하고 떨리는 마음, 설레고 조금은 obsessed 되는 감정도 정말 오랜만에 느꼈다.
그 사람은 나랑은 될 수 없는 사람이었기에, 애달픈 마무리를 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꼈다는 거에 감사했고, 결혼 병을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사랑이 없이 관계가 시작될 수 없다는 것을 올 초에 절감했고
사랑이 오지 않을 것 같아도 그냥 살다 보면 이렇게 찾아올 수 있다는 것에 그냥 좀 느긋해졌달까.
일 년 반, 승진을 약속받았다.
병가를 갔던 4개월을 제외해도 이직을 한지 일 년 반이 되었다.
입사 후 처음엔 모든 미팅을 녹음해야 했을 정도로 많이 허덕였다.
내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는 물론이고 나조차 내가 하고 있는 말이 이해가 안 될 때도 많았다, 기본적인 의사소통조차 안 되는 기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나는 언어, 문화, 직장, 나라, 직무, 직급 등 많은 것을 바꾼 셈이었다.
병가에서 돌아왔을 때만 해도, 내 퍼포먼스에 대해서 내 매니저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의구심이 있었다.
내가 결국 여기서 살아남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이후에 딱히 더 잘하려고 뭔갈 바꾼 것은 없었다. 그냥 그래도 배우는 것이 있으니 좀 더 있어보자는 생각으로 하던 데로 했다. 늘 영어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스피치 기회가 많아졌고, 사람들이 내 퍼블릭 스피킹에 대해 칭찬을 하는 것을 종종 들을 수 있었다.
연말 평가 리뷰 자리에서 매니저가 "너의 커뮤니케이션은..."이라고 운을 띄었을 때, 나는 속으로 "올게 왔구나.. 내 영어 때문에 의사소통이 안된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거구나.."라는 지레 겁을 먹을 정도로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자신감이 참 많이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피드백은 그 반대였고, 모든 평가 요소에서 내가 self-evaluation 한 스코어보다 훨씬 좋은 스코어를 매기며, "You will be promoted... you are well deserved..." 등의 연초에는 상상치도 못했던 말들을 듣게 되었다.
많은 일에도 불구하고 늘 지루했다.
돌이켜보면 뭐 여느 때와 같이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다. 시도 때도 없이 한국에 왔으며, 싱가포르에 두 번 방문했고.. 처음으로 뭄바이, 델리, 발리, 뉴욕, 그리고 마닐라를 갔다.
그런데 늘 지루했다. 지루하지 않으려고 부단하게 노력했는데 늘 지루했다. 그렇지만 또 평화로웠다.
자유로웠고 불편한 것이 없었으며 일상이 예측가능하고 편리한 방식으로 흘러갔다.
생각해 보면 그냥 집에서 가만히 있을 때도 많았다. 사람들이 불러야만 나갔고, 딱히 친구들을 만나러 다니려 하지도 않았다. 지쳤던 걸까? 올해는 그래도 충전이 필요했던 걸까.
그래도 평화와 활기 (혹은 재미) 중에 하나라도 잡았던 것에 감사하다. 나쁘지 않은 날들이다.
서른여섯이 온다.
나이 드는 것은 무섭다. 내 나이도 무섭고 부모님 나이도 무섭다. 그래도 여태까지 나름 잘 헤쳐나가고 있다. 나는 나에 대해서 더 알아가고, 나를 더 행복하게 만들려고 끊임없이 고민하며, 남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다. 더 행복한 날들이 기다리고 있기를. 괴로워도 웃을 수 있는 여유가 늘 있기를.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
Merry Christmas!
2023. 12.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