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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하 Dec 18. 2020

조용한 이 동네가 왜 이렇게나 좋을까, 제주 Day 3

아무래도 종달리와 사랑에 빠진 것 같다



TODAY'S BGM

Kings Of Convenience - Rule My World

https://youtu.be/7Ai2QjPFTB8






오후에 방문한 가게에서 가져온 노랑 소식지 뒷면에 일기를 쓰고 있다. 자세히 읽어보니 우리 숙소와 가까운 어느 소품샵에서 만든 소식지다. 아기자기한 그림이 그려져 있고 추천 상품이 소개되어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다녀오는 건데, 아쉽게도 오늘은 세화의 마지막 날이다. 내일이면 숙소를 떠나 성산으로 가니까.



억새가 아름다운 아끈다랑쉬 오름. 가을에 오길 잘했다!



오늘은 비자림과 아끈다랑쉬 오름에 다녀왔다. 여행 3일 차 만에 제주다운 자연을 한껏 느꼈다. 비자림은 제주에 오기 전부터 엄마가 오고 싶어 했던 곳이라 잊지 않고 일정에 넣었다. 기왕 숲으로 가는 거 한적한 아침에 가면 좋을 것 같아 8시 반쯤 숙소를 나섰다.


꼬불꼬불한 차도를 달려 도착한 비자림. 만 24세 이하까지는 청소년 요금을 받고 있었다. 괜히 기분이 좋아져 지폐와 동전을 주섬주섬 꺼내어 1500원을 결제했다. 나 아직 젊구나!



몇살일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거대하고 웅장한 나무
아직 여름의 빛깔이 남아있었다



열심히 걷고 걸었다. 이렇게 걸어본 게 얼마만인지. 아침 산책이 이렇게 좋았나. 마스크를 잠시 내리자 숲 냄새가 진하게 밀려왔다. 평소 비자림은 관광객으로 가득 북적인다는데, 일찍 온 덕분에 조용하게 걸을 수 있어 좋았다.


원래는 짧은 A코스를 걸을 예정이었지만 걷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B코스까지 다녀왔다. 넉넉 잡아 왕복 1시간 정도면 충분했다. 비 오는 날의 비자림도 그렇게 좋다고 하던데. 언젠간 다시 올 수 있겠지?




이런 곳에 서점이 있어? 할 만큼 종달리는 작은 동네다. 하지만 아담한 서점 안에는 책을 구경하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모두들 한 손엔 책을 사 들고 나왔다.




그토록 가고 싶었던 소심한 책방도 다녀왔다. 평소 독립출판물을 좋아하기에 여러 독립출판 관련 계정을 팔로우하고 있다.


책이 출간되면 입고된 서점 목록이 SNS에 올라오는데, 늘 내 눈을 사로잡는 건 제주의 서점이었다. 소심한 책방, 라바 북스, 라이킷, 무명 서점... 그걸 보면서 '이분들은 제주에 직접 가서 입고하시고 오는 걸까?'라는 생각도 했더랬다. 언젠가는 꼭 방문하고 싶었는데 드디어 오다니!


제주에 오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독립서점이었다. 누군가는 독립서점이야 서울에도 있는 것 아니냐고 물을 수 있지만, 각 서점마다 입고된 책은 저마다 다르고 분위기도 각양각색이다. 알지 못했던 훌륭한 책을 발견하는 기쁨은 오직 독립서점에서만 느낄 수 있다. 책으로 가득한 공간이 주는 특유의 느낌과 감성이 참 좋다.



창밖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예쁘던 카페 모뉴에트.



찬찬히 둘러보고 고민한 끝에 소심한 책방에서 출판한 제주살이 에세이를 구매했다. 제목은 <수상한 기록>. 종달리 게스트하우스 ‘수상한 소금집’에서 만난 3분의 글이 모여 하나의 책이 됐다. 그중 한 분은 소심한 책방에서 잠시 스탭으로 일하신 분이더라. 내심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책방 스탭이라니! 언젠가 나만의 작은 서점을 운영하는 건 나의 로망 중 하나다.





순희 밥상에서 맛있는 갈치조림을 먹고 동네를 걸었다. 종달리는 참 시골이었다. 지금 머물고 있는 세화보다 작은 동네였다. 한적하고 여유로웠고 곳곳엔 당근과 콜라비가 심어진 밭이 참 많았다. 당근 이파리가 이토록 푸르고 어여쁜지 여태 몰랐다.


종달리와 세화가 있는 구좌읍은 제주 내에서도 당근이 가장 맛있는 곳이라고 하던데, 아무래도 내일은 성산으로 떠나기 전 당근주스를 꼭 사서 마셔봐야겠다.  


푸르른 당근밭 잎사귀들



제주의 자연은 정말 짙은 초록색이다. 온 힘을 다해 생명력을 뿜어내는 초록색이다. 한참을 들여다봐도 질리지가 않는 아름다운 풍경들. 카메라 뚜껑을 열고 닫았다를 수없이 반복했다.


걷고 걸어도 질리지가 않았다. 이곳에서 15분 정도만 걸으면 바다도 보이고 건너편을 내다보면 성산일출봉까지 보인다고 한다. 종달리는 한자로 ‘마칠 종, 통달할 달, 마을 리’ 를 사용하는데, 제주시의 동쪽이 끝나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제주시와 서귀포시의 경계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동네에서 사는 건 어떤 기분일까. 종달리에서는 유독 장기 숙박을 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다들 이 한적함에 반해 종달리로 떠나 오는 거겠지. 버스도 잘 다니지 않고 편의점도 없지만 이 동네만이 지닌 매력은 너무도 분명하니까.






여기저기 알차게 구경한 하루. 이곳은 감각적인 소품을 판매하는 종달리의 <근자C가게>.



저녁에는 다시 세화로 돌아와 로컬 맛집처럼 보이는 고깃집에서 흑돼지를 먹었다. 그리고 하루의 마무리 코스로 매일 방문하던 하나로 마트로 향했고, 엄마는 그저께 사 왔던 군고구마가 너무 맛있었다며 군고구마를 집어 드셨다. 나는 어제부터 눈여겨보던 한정판 쌀 빼빼로를 골랐다.


마지막 날이니만큼 하루를 이대로 마무리하긴 아쉬워 엄마와 숙소 1층 공용 카페로 내려와 차를 마셨다.




사장님과 귀여운 강아지 마음이.



그러던 중 숙소 사장님은 강아지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셨고, 나는 아까 사 온 쌀 빼빼로 3개를 사장님께 드렸다. 그러자 사장님은 혹시 말고기 좋아하냐며, 오늘 지인이 말을 잡았다고 한 접시 주신다고 하셨다. 말고기라니! 생전 한 번도 먹어본 적 없지만 궁금했다. 그렇게 사장님과 셋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말고기와 막걸리를 마시게 됐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우리는 어제 갔던 평대리 해변이 너무 예뻤다는 얘기를 했다. 그러자 사장님은 갑자기 어딘가로 전화를 하시더니, 평대리에 있는 예쁜 게스트하우스를 구경시켜주신다고 하셨다.





얼떨결에 차를 타고 3분 만에 도착한 조용한 게스트하우스에선 여자 사장님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제주에 내려온지는 10년 정도 되셨고, 여기서 그림도 그리며 숙소도 운영하고 계신다고 했다. 손님들이 조식을 먹는 부엌 벽면에는 직접 그리신 작품들이 걸려 있었다. 마치 비밀스럽고 안락한 아지트 같았다. 사장님 덕분에 근사한 곳에 초대를 받았다.


테이블에 둘러앉아 귤과 간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고, 중간엔 평대리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시는 젊은 사장님도 오셔서 자리를 함께했다. 사장님은 내일 아침엔 귤 따기 체험을 해볼 수 있게 해주신다고 했다. 제주에서 귤 따기라니! 이보다 재밌는 일이 있을까. 무뚝뚝하신 분인 줄만 알았는데 떠나기 전날 이렇게 호의를 베풀어 주셔서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내일 아침엔 성산에 있는 귤 농장으로 간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 잠시 밖으로 나오니 밤하늘엔 별이 많았다. 주변은 아주 고요했다. 별 말고 나를 비추는 빛은 없었다. 집에선 잘 보이지 않던 별이 여기선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벌써 제주에서도 고마운 인연을 여럿 만났다. 처음 만났지만 누구보다 정답게 얘기를 나누고 웃을 수 있었다.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풍족한 하루. 세화를 떠나는 발걸음이 덜 아쉬울 것만 같다.



아, 그리고 오늘도 공짜 귤을 실컷 먹었다.

역시 귤의 섬, 제주!






떠나온 후에도 자꾸만 생각나던 세화 바다.


종달리 카페 모뉴에트에서 먹었던, 맛있는 까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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