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정말이지 제주스럽구나!
Today's BGM
Tahiti 80 - 1000 times
글과 함께 들으면 좋을 곡입니다 :)
제주에 와서 맞이하는 첫 주말!
오늘은 3일간 머물던 세화를 떠나 성산으로 내려갈 예정이다.
세화를 떠나는 아침, 출발 전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 세화 해변으로 짧은 산책을 나왔다. 숙소에서 5분만 걸으면 도착하는 바다. 청명하고 시원한 풍경에 마음도 개운해진다.
해변을 찬찬히 걷다 마침 근처 당근주스를 파는 카페가 떠올라 발걸음을 옮겼다. '100% 제주 당근주스'라는 현수막이 크게 걸린 이곳. 카운터 너머 보이는 냉장고는 당근으로 꽉꽉 채워져 있다. 고운 주황빛 당근주스를 건네받고 한 모금 호록 마셔본다.
원래 당근이 이렇게나 달았나? 설탕이 들어가지 않았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달콤하고 시원하다. 제주 당근은 맛있기로 워낙 소문났지만, 특히 세화 해변이 있는 구좌읍 당근은 아주 유명하다. 평소 당근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런 주스라면 매일매일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덕분에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한다.
당근주스까지 야무지게 마시고 귤 농장을 향해 달리고 달렸다. 사실 계획에 있던 일정은 아니었다. 제주도 하면 역시 귤이기에, 그저 귤 수확 체험을 해보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했을 뿐이다. 근데 마침 숙소 사장님이 지인이 하는 귤 농장을 알고 있다며 소개해주신 덕분에 이렇게 빨리 방문하게 됐다.
제주시를 지나 서귀포시로 진입한 지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덧 하늘은 점점 파랗게 개고 기온은 한결 따뜻해졌다. 아니, 정확히는 갑자기 내리쬐는 햇볕에 더울 지경이었다. 같은 제주인데 조금 내려왔다고 이렇게 날씨가 다를 수 있다니.
서귀포 귤이 맛있는 이유도 남쪽이 북쪽보다 따뜻해서 그런 거라고 하던데, 정말 그랬다. 여름같이 화창한 풍경 속으로 진입하자 양옆으론 주렁주렁 귤이 열린 귤나무가 보였다.
드디어 도착한 귤 농장. 사장님은 우리에게 빨간색 가위를 쥐어 주고선 귤 따는 법을 알려주셨다. 귤을 조심스레 잡고 꼭지 가장 아랫부분을 톡, 하고 잘라주면 된단다. 주의할 점은 귤이 상자에서 굴러다니며 다른 귤에 상처를 내지 않도록 꼭지 부분을 잘 다듬어야 한다고 했다.
귤을 수확하기 위해 나무 사이사이를 돌아다녔다. 갈증이 나면 그 자리에서 귤을 따 먹었다. 역시 달콤 새콤 맛있구나. 껍질이 얇으면서 크기가 적당한 것이 달고 맛있는 귤이라고 한다.
귤나무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건 오늘이 처음이었는데, 생각보다 아담한 키와 기다란 잎사귀를 지녔다. 가장 놀랐던 건 한 나무에 귤이 100개 이상 매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아, 그럼 마당에 귤나무가 한 그루만 있어도 참 행복하겠네 -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귤을 따다 보니 바구니는 금세 무거워졌다.
두 바구니를 가득 채우니 어느덧 1시간이 흘렀다. 바구니의 귤을 박스로 옮겨 담고, 귤 체험을 할 수 있게 도와주신 사장님께 감사하단 인사를 건네며 허기진 배를 채우러 고기 국숫집으로 향했다.
식당 주차장에 도착하니 이미 가게 앞에 줄지어 서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아, 맞다. 오늘 토요일이지? 주말이라는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다. 기다리기엔 배가 고팠기에 하는 수 없이 근처 다른 고기 국숫집에 갔다. 그래도 든든하니 맛있는 걸!
그렇게 점심식사를 마치고 산책도 할 겸 식당 뒤편에 있는 언덕을 올라갔다. 그러자 믿기 힘든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수많은 파도가 쉴 새 없이 달리고 있었다. 주변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세찬 파도소리뿐이었고 저 멀리 서있는 사람조차 아주 작은 점으로 보였다. 잔잔하고 조용하던 세화의 바다와 달리 성산의 파도는 아주 사나웠다. 너희는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걸까?
그림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물웅덩이를 피해 조심조심 바다로 다가섰다. 파도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옷을 적실만큼 높은 파도가 쳤다.
시간을 거슬러 아주 오래전으로 떠나온 듯했고 그간의 고민들이 사라져 버릴 만큼 압도적인 풍경이었다. 우연히 올라온 언덕에서 이런 광경을 마주하리라고는 그 누가 알았을까.
숙소로 돌아와서야 내가 있던 곳이 광치기 해변이라는 걸 알았다. 사실 제주에 오기 전까지 성산에 대한 기대가 없었다. 그저 성산일출봉이 있는 지역이라고만 생각했기에 굳이 들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오늘 나의 오만한 생각은 산산조각 났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작은 존재였다. 그 사실이 모순적이게도 이상한 위로가 되었다.
근처 미술관에서 전시를 보고,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카페에서 달콤한 초코 라테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날은 점점 저물었다.
마침 근처 유명한 마농 치킨('마농'은 제주 방언으로 마늘을 뜻한다) 가게가 있었기에, 저녁은 숙소에서 치맥을 먹기로 했다!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나는 치킨을 포장하고 숙소로 걸어가는 길. 차를 타고 빠르게 지나쳤던 풍경이 선명히 보인다. 덕분에 영국 느낌 물씬 나는 피시 앤 칩스 가게와 빈티지스러운 카페를 발견했다. 성산을 떠나기 전 꼭 가보겠다고 다짐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역시 걸어야 보인다. 구석구석 거리를 관찰하는 즐거움은 그 무엇도 대신하지 못한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뚜벅이가 좋은 것 일지도 모르겠다. 제주 서쪽을 여행하는 다음 주부터는 렌터카를 반납하고 뚜벅이로 다녀야 한다. 비록 몸은 힘들겠지만 그만큼 더 많은 것을 눈에 담고 느낄 수 있겠지?
어느덧 제주 여행 4일 차. 지금 와서야 느낀 사실은 내 삶이 다채롭다면 SNS 속 세상은 신경조차 쓰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지난 3월부터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자 SNS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늘어났고 우습게도 타인의 일상을 부러워했다. 누구나 멋진 모습만 보여주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자주 속았다.
이제는 조금은 알 것 같다.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 보이는 것 따위에는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오늘 방문한 전시도 마찬가지다. 입장료가 아까울 만큼 겉멋만 잔뜩 든 공간이었으니까. 건물만 근사했을 뿐 아무런 흥미와 감동도 주지 못했다.
스마트폰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요즘 세상에선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텅 빈 것들이 너무 많다. 모두들 본질은 잊고 겉치레에만 신경 쓴다. 나 또한 그런 사람이 되지 말자고 매번 다짐하지만, 역시나 아직은 쉽지 않다. 그래도 이번 제주 여행으로 벌써 마음을 단단하고 충만하게 채워가고 있는 것 같아 조금은 마음이 놓인다.
제주 이곳저곳을 많이 다녀서
꼭 제주에 사는 사람이 된 것 같다.
무모하다면 무모한 15박 16일의 제주여행
무모하게 떠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여행이 내게
오래도록 기억되리라는 확신이 드는 밤.
글에 나온 공간들
: Good Places to Visit
광치기 해변
서귀포시 성산읍 오조리
카페 라라라
제주시 구좌읍 해맞이해안로 1430 1층
카페 수마
서귀포시 성산읍 일출로 264-6 1층
제주 여행기는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