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낭만은 어쩔 수가 없네
TODAY'S BGM
Sidney Bechet - Si Tu Vois Ma Mère
https://www.youtube.com/watch?v=bmVTnLR02Nc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참 좋아한다.
뭐랄까, 그건 도무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영화다.
예술의 황금기였던 1920년대 파리를 동경하는 주인공 '길'이 우연히 시간여행을 떠나 동경하던 예술가들을 만나는 환상적인 줄거리의 영화. 헤밍웨이부터 피츠제럴드, 달리 등 당대 쟁쟁한 예술가들이 등장한다.
영화는 감탄의 연속이었다. 주인공이 부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단 하루만이라도 그가 될 수는 없을까? 발걸음이 이끄는 대로 아름다운 파리를 걸으며 풍경의 일부가 되고 싶었다.
유럽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시작된 건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흘렀을까.
마침내 꿈꾸던 파리에 왔다.
이 도시에서 할 일은 아주 분명했다.
'영화 속 주인공이 걸었던 골목을 걸어야지, 헤밍웨이가 사랑방처럼 드나들며 글을 썼다던 서점에 가야지, 에펠탑 야경을 바라보며 좋아하는 맥주 '블랑'을 마셔야지!'
결론부터 미리 말하자면, 빠짐없이 다 이뤘다. 세상을 가진 기분이 이런 걸까? 꿈결 같은 나날의 연속이었다.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SHARKESPEARE AND COMPANY
파리에서의 두 번째 날.
눈을 뜨자마자 향한 곳은 서점이었다.
1951년 문을 연 파리의 유명 독립 서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Shakespear & Company).
헤밍웨이의 단골 서점이자 제임스 조이스, 오스카 와일드, 거투르드 스타인 등 수많은 작가들이 글을 쓰던 아지트이자 커뮤니티 역할을 했다던 이 곳. 파리에서 단 한 곳만 갈 수 있다면 망설임 없이 이곳을 택할 터였다.
영감과 아이디어가 꽃피고 역사적인 작품이 탄생하던 서점은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와 <비포 선셋>에 등장하기도 했다.
서점은 노트르담 성당 건너편에 위치해 있었다. 다리를 건너 골목 안쪽으로 들어오자 고풍스러운 진초록색 외관이 보인다.
역시나 유명한 서점답게 이미 많은 사람들로 가게 앞은 북적거린다. 안으로 들어서자 책으로 빼곡한 서재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 넓지 않은 내부였지만 책 구성은 부족함 없이 알찼다. 여러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어 구석구석 살펴보는 재미가 있었다. 꼭 오래된 보물 창고를 탐험하는 느낌이었달까.
평소 좋아하는 펭귄 북스 책부터 유명한 고전 소설과 최근 출간된 베스트셀러까지. 없는 책이 없었다.
서가를 훑던 중엔 배우 에단 호크의 소설도 발견했다.
영화 <비포 선셋>에서 에단 호크는 이 서점에서 강연을 하는 소설가로 등장하는데, 실제로도 글쓰기에 관심이 많아 벌써 여러 소설을 출간했다고 들었다.
조만간 기회가 되면 읽어보리라 다짐하며 책을 다시 제자리에 꽂아두었다.
삐그덕거리는 좁은 나무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가니 귀여운 고양이가 창문 앞 책상에 앉아 기지개를 하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자 책상 위에는 '어제 고양이가 밤새 책을 읽느라 피곤하오니 깨우지 말아 주세요'라는 내용의 귀여운 쪽지가 붙어 있다. 너는 이렇게 멋지고 근사한 곳에서 살고 있구나. 이제는 고양이마저 부러울 지경이라 웃음이 났다.
참새가 방앗간을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이곳에서 책을 사지 않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어떤 책을 골라야 할지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고민했다. 프랑스에 왔으니 아무래도 프랑스 작가 책이 좋을 것 같았다.
프랑수아즈 사강, 랭보, 사르트르... 무수한 선택지 속에서 결국 좋아하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골랐다.
책을 집어 들고 가죽 책갈피 하나를 챙겨 계산대로 향했다. 서점원은 책 내지에 서점 도장을 쿵, 찍고 두툼한 파란색 봉투에 책을 담아준다. 고작 책 한 권을 샀을 뿐인데 날아갈 듯 기뻤다.
파리를 떠나는 마지막 날, 나는 한번 더 이곳에 왔다.
그리곤 다시 오지 못해도 아쉽지 않을 만큼 오랫동안 머물렀다.
영화 속 가판대와 시간여행 마차
영화 속 촬영지를 방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주인공 길이 한가로이 거닐며 구경하던 파리 가판대와 시간여행을 떠나는 마차가 있던 골목까지, 전부 빠짐없이 방문했다. 영화 주인공이 된 기분을 만끽하며 한참을 머물렀다.
여름밤, 에펠탑과 블랑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에펠탑 야경을 바라보며 블랑 마시기'는 감격스럽게도 첫날에 이룰 수 있었다.
현아언니와 마트에서 블랑 맥주 두 캔을 간단히 사고 버스에 올랐다. 창밖으로 저 멀리 에펠탑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잔디에 앉아 있었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선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OST인 'I Love Penny Sue'를 틀고 반짝거리는 에펠탑을 바라보며 맥주를 홀짝였다.
얼마나 예쁘게 반짝거리던지. 촌스럽게도 눈물이 고였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정말 그랬다. 영화 속 장면을 한없이 들여다보며 꿈꿨던,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파리가 눈앞에 있다.
어느 도시에서도 이토록 진한 낭만을 느껴본 적 없었는데, 파리의 낭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왜 그 많은 사람들이 파리를 외치고 노래했는지 이제는 알 것만 같아.
젊은 시절 한때를
파리에서 보낼 수 있는 행운이
그대에게 따라 준다면,
파리는 움직이는 축제처럼
평생 당신 곁에 머물 것이다.
내게 파리가 그랬던 것처럼.
- Honest Hemingw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