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왜 갔어요? 네, 와플이랑 커피 먹으러 왔어요.
TODAY'S BGM
DJ Mitsu The Beats - Masquerade
https://www.youtube.com/watch?v=Ur_obP-sBYU
처음부터 큰 기대는 없었다. 사실은 오지 않으려고 했다. 마땅히 구경하고 싶은 것도 없었고 인종차별도 심하다는 이야기를 들어 그리 내키지 않았다.
원래라면 파리 여행을 마치고 바로 런던으로 넘어갈 생각이었지만, 파리에서 출발하는 버스는 어차피 벨기에를 통과하는 노선이었다.
계획을 바꿨다. 정 이렇게 된 거 그냥 수도 브뤼셀에서 딱 하루만 머물러보자고. 별다른 기대 없이 대충 버스와 숙소를 예매했다. 벨기에 와플 유명하니 와플이나 실컷 먹고 오면 될 것 같았다.
파리를 떠나는 날 아침. 버스를 타야 하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냥 파리에 하루 더 머물걸 그랬나? 설상가상으로 브뤼셀 일기예보를 찾아보니 비가 올 예정이란다.
급하게 구글 맵을 켠다. 다행스럽게도 마그리트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고 해서, 첫 목적지는 그곳으로 정했다.
생각보다 금방 도착한 브뤼셀. 버스에서 내리니 하늘이 심상치 않은 게 꼭 비가 쏟아질 것 같다.
하차하는 정류장은 치안이 나쁘기로 유명한 브뤼셀 북역에 있어 내리기 전부터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캐리어는 오늘따라 왜 이렇게 버겁게 느껴지는지, 혼자여서 그런지 짐도 마음의 무게도 더 크게 느껴진다.
돌덩이처럼 무거운 20kg 캐리어를 끌고 역 안을 방황했다. 짐 보관소가 보이지 않아 한참을 헤매다 발견한 인포메이션 센터.
다행히 직원분이 친절히 안내해주시고 동전도 바꿔주신 덕에 무사히 짐을 맡겼다. 몸이 가벼워지니 그제야 한 숨 놓인다. 벌써 3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마그리트 미술관은 5시면 문을 닫기에 서둘러 버스를 탔다.
전시는 기대 이상이었다.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도 붐비지 않아 여유롭게 관람할 수 있었다. 찬찬히 작품을 곱씹고 감상하다 보니 마그리트와 조금 친해진 기분이다.
무엇보다 굿즈샵에 탐나는 예쁜 물건이 많아 지갑을 잔뜩 털리고 왔다. 귀여운 책갈피와 엽서, 마그넷 등등.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리 없지!
전시를 보고 밖으로 나오자 하늘이 조금 개어있다. 출출한 배도 채울 겸 유명한 와플 가게에 왔다. 번화가 모퉁이에 있는 와플집은 맛집답게 많은 사람으로 붐볐다. 다행히 2층 좌석은 여유가 있어 자리를 잡고 조금 기다렸다.
얼마 뒤 건네 받은 갓 나온 따끈따끈한 초콜릿 와플과 카푸치노. 설레는 마음으로 한 입 베어 문다. 눈이 휘둥그레 해진다. 이렇게 맛있어도 되나? 호떡 반죽처럼 쫀뜩쫀득하면서도 버터의 진한 풍미가 느껴졌다. 역시 원조는 달랐다. 카톡으로 친구들에게 호들갑을 떤다. "얘들아, 벨기에 와플 진짜 대박이다." 함께 주문한 커피도 기계로 뽑은 것인데도 이상하게 맛있다.
꽤나 정신없었던 오늘 하루. 이제야 멍도 좀 때리고, 여유를 즐기며 노트를 펼쳐 몇 글자 끄적거린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중, 창밖을 내다보니 하늘이 다시 어두워지더니 비바람이 쏟아진다. 조금 열린 창문 틈에서 들어온 서늘한 한기에 몸이 으슬으슬하다. 우산은 하필 캐리어에 두고 왔다.
8월이니 당연히 한여름 날씨일 거라 예상했었는데 오산이었다. 밖으로 나가 좀 걸을 생각이었지만 비가 그칠 때까지 꼼짝없이 기다려야 했다. 하는 수 없이 비가 그치면 숙소 쪽으로 걸어가기로 마음을 굳힌다.
숙소 앞엔 관광지로 유명한 그랑플라스 광장이 있었다. 많은 관광객이 기념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어 보였지만 내게는 큰 감흥이 없었다. 독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처럼 느껴졌달까. 사진 몇 장만 대충 남기고 저녁 먹을만한 곳을 찾아 조금 걸었다.
음식 상황은 독일보다 심각했다. 광장 주변을 한참 돌아다녔지만 먹을 거라곤 커피, 와플, 초콜릿, 감자튀김이 전부였다.
서늘한 날씨에 걸맞은 뜨끈한 국물요리를 먹고 싶었으나 역시 찾을 수 없었다. 독일에서 생활하며 꽤나 고달팠던 건 국물 요리가 없는 거였다. 근처 베트남 쌀국수 음식점에 가거나 한인 마트에서 라면을 구매하는 게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벨기에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정신없이 북적이는 감자튀김 가게에 들어가 얼렁뚱땅 저녁을 해결하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다음날 아침. 다행히 비는 오지 않지만 하늘은 여전히 희멀건 회색빛이다.
캐리어를 숙소 1층에 맡기고 거리를 어슬렁 거리던 중 와플 가게를 발견했다. 아메리카노와 와플 세트가 2유로, 단돈 2천 원이란다.
주문을 하고 벤치에 앉아 와플을 먹는데 믿을 수 없을 만큼 맛있다. 커피는 또 왜 이렇게 맛있는 걸까? 이 도시에서 유일한 기쁨은 오직 와플과 커피뿐인가 싶어 웃음이 난다.
런던으로 가는 버스는 오늘 늦은 오후에 출발한다.
아직 꽤 여유가 있어 유명하다는 오줌싸개 동상도 내키지 않지만 보고 왔고, 버스에서 먹을 초콜릿까지 샀음에도 시간이 많이 남았다. 브뤼셀은 그리 크지 않아 생각보다 할 게 별로 없었다. 이리저리 거리를 방황했다. 거리엔 사람도 잘 보이지 않아 썰렁함이 감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통창이 근사한 가게를 발견했다. 가까이 다가가니 카페인 모양이다. 분위기가 좋아 보여 슬며시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은 다 여기에 있었다. 근처에 대학교가 있다고 들었는데, 노트북으로 과제를 하는 대학생이 많아 보인다. 다들 두꺼운 전공책과 프린트물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높은 층고와 우드톤의 깔끔한 인테리어, 시원시원한 글씨체로 꾸며진 커다란 메뉴판도 마음에 쏙 들었다.
사람들 사이에 슬며시 자리를 잡고 앉는다. 날도 쌀쌀하니 우유가 들어간 커피가 제격이다 싶어 따뜻한 플랫 화이트(라떼보다 우유 양이 적어 진한 맛을 내는 커피)를 주문했다.
직원분은 프랑스어로 인사를 건넨다. 벨기에의 공용어는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독일어 총 3개로 다들 무슨 언어를 사용할지 궁금했는데, 브뤼셀은 대부분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것 같다.
예쁜 하트가 담긴 잔을 건네받고 한 모금 마셨는데, 정말이지 인생 최고의 커피라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이걸 마시려고 벨기에를 왔나 싶을 정도로 이틀 내내 꿀꿀했던 기분이 사르르 녹는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벨기에는 와플과 커피 맛집이라는 걸.
축축한 회색빛 도시로 기억될 브뤼셀에게 떠나는 날 소중한 선물을 건네받은 기분이다. 혼자 하는 본격적인 긴 여행은 이번이 처음이라 걱정이 앞섰는데, 런던에서도 씩씩하게 잘 다닐 수 있을 것 같다는 용기가 생긴다.
런던으로 떠나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 글에 등장한 카페
OR Coffee Rue Auguste Orts 9, 1000 Bruxelles, 벨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