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산부 배려석
처음 병원에 가서 아기집이나 심장소리를 확인하고 나면 병원에서 임신확인서 서류를 떼어준다. 출산예정일이 언제이며 아이가 단태아인지 다태아인지 등의 정보가 적혀있는 이 서류가 있으면 임산부로서 인정받은 것이나 다름없으며 국가에서 시행하는 다양한 임산부 지원 서비스에 신청이 가능하다.
나는 가장 먼저 이 서류를 받은 후 보건소로 향했다. 바로 임산부 등록을 하기 위해서다. 등본상 주소지에서 가까운 보건소에서 임신확인서와 신분증을 제출하면 임산부 등록을 진행해 준다. 그리고 임산부 등록에 따른 지원 물품도 준다. 물론 각 지차체 별로 제공되는 임산부 등록에 따른 물품은 상이하지만 임산부 배지는 무조건 준다!
간혹 지하철 탈 때면 50명 중에 1명 보일까 말까 한 이 임산부 배지를 실제로 손에 쥐어보다니 느낌이 생경했다. '이제 임산부 배지를 받았으니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을 이용할 수 있겠다!'라고 생각했다
임산부 배지를 달고 첫 출근길.
임산부 배려석은 지하철 각 칸마다 왼쪽, 오른쪽 한 좌석씩 총 두 좌석이 분홍색으로 표시되어 마련되어 있다. 처음에는 임산부 배려석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그냥 아무 빈자리에 앉거나 서서 갔다. 사실 내가 아직 임산부인 것도 실감이 나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 지나며 입덧이 찾아오고 자궁이 커지면서 아랫배 통증이 종종 발생하고 오래 서 있으면 자궁 아래가 빠질 것 같은 통증이 쏠려오자 출퇴근 내내 서서 가는 것이 버거웠다. 더구나 입덧으로 속이 울렁거릴 때면 아무것도 못하겠고 서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제야 살려면 앉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 임산부 배려석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파악했다. 그리고 임산부 배려석이 가장 가까운 출입문으로 타기 시작했는데 놀랍게도 이 글을 쓰는 현재까지도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본 적이 손에 꼽는다.
늘 탑승을 하면 임산부 배려석에는 누군가 앉아있었다. 출퇴근 시간을 제외한 다른 시간대(임신기 근로시간 단축기간 동안 붐비는 출퇴근 시간대를 피하여 10시, 16시를 이용)에도 탑승을 했으나 상황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학생도 아주머니도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아저씨도 청년도 모두가 앉아있었다. 이렇게 연령대도 성별도 구분 없이 앉아있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임산부 배려석을 그저 분홍색으로 된 자리 정도로만 인식하는 것 같다.
'안 그래도 사람 많아서 붐비는데 어차피 임산부 배려석이니까 앉아있다가 임산부가 오면 양보하면 되잖아'라는 생각으로 앉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다들 말은 그렇게 하면서 실제 행동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심지어 러시타임이 아니라 빈 좌석이 많은 경우에도 앉아있다!)
그들의 시선은 임산부가 언제 타는 것일까 확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까만 네모에 꽂혀있거나 굳게 감겨있기 때문이다. 눈을 뜨고 있으면? 아무리 임산부 배지를 달고 탑승하면 무엇하나 싶은 현타가 찾아올 정도로 그저 쳐다보고 다시 휴대전화로 시선을 돌리는 경우가 많다. '응 배지했어? 근데 뭐 어쩌라고? 네가 비켜달라고 하지 않잖아?'라는.
본인의 권리는 본인이 챙기는 것이라지만 실제로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다짜고짜 다가서서 "임산부라서 그러는데 양보를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라고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런 상황이다 보니까 임산부 배려석이 가까운 출입문으로 탑승을 하더라도 실제로 좌석 양보를 받은 적은 6개월 동안 단 한 번뿐이다. (과장인 것 같은가? 주변 임산부에게 다 물어보시라 절대 이 말이 거짓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유난히 사람이 많던 그날도 임산부 배려석에 이미 누군가가 앉아있었다. 이리저리 시선을 돌려보아도 빈 좌석은 없었고 다음 정거장에서는 물밀듯이 사람들이 밀려들어와서 발 디딜 틈 없었기에 임산부 배려석 바로 앞에 서 있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임산부 배려석에 자리가 났고 그제야 그 자리에 앉으려고 했다.
그러자 갑자기 건너편에서 "와 거 앉노! 비키 봐라 저 가가 앉으소!" (왜 거기 앉니? 비켜봐 당신은 저기 가서 앉아)라는 소리가 들렸다. 건너편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계시던 할머니께서 바로 앞에 서있는 남편으로 추정되는 할아버지에게 임산부 배려석에 앉으라고 얘기하며 나더러 비키라는 것이었다. 굉장히 어이없었지만 할머니를 빤히 쳐다보며 좌석에 앉았고 그 타이밍에 할아버지는 할머니 옆좌석에 자리가 나자 그곳에 앉으셨다.
이런 상황들을 겪고 보니 누군가는 지하철 출퇴근이 버거워서 임신 초기에 퇴사를 결정하기도 한다는데 그럴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가 불러야만 몸이 무거워지고 허리가 아픈 것이 아니다. 임신은 초기부터 여러 가지 신체적으로 불편한 증상들이 동반된다. 아기가 자랄 수 있는 자궁이 튼튼하게 자리 잡기 위해서 생리통처럼 싸르르하게 아랫배를 콕콕콕 찌르는 통증이 생기고 오래 서있으면 아래쪽으로 피가 쏠려서 마치 누군가가 아래쪽을 잡아서 당기는 것처럼 뻐근할 때도 있다. 릴렉신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됨에 따라 '환도선다'라는 골반 통증에 제대로 걷기 힘들어하기도 한다. 거기다가 입덧까지 더하면 불편함은 엎친데 덮친 격으로 상상을 초월한다.
건강한 신체를 가진 사람들도 모두가 지옥철이라고 부르면서 출퇴근 지하철을 굉장히 버거워한다. 그렇다면 외적으로는 똑같아 보이지만 내적으로 새로운 우주가 만들어지느라 모든 세포가 분주한 임산부라면 오죽할까?
문이 열리고 닫히고 이쪽 문부터 반대편의 문까지 사람들의 머리로 가득 차있는 이 지옥철에서 어서 목적지에 도달하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은 임산부에게는 너무 버거울 수밖에 없다.
오늘도 '임산부가 탑승하면 자리를 양보하라'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지만 여전히 임산부 배려석에 앉은 누군가를 바라보며 출근했다.
'임산부 타면 비켜드릴게요'
'난 임신하지 않았고 앞으로 할 일도 없을 것이고 지금 당장 내 몸이 힘든데 자리를 왜 비켜줘?'
'임신이 벼슬이냐 남들 다 하고 다 겪는 일인데 그거 하나 못 참냐?'
'너보다 내가 더 힘들다'
'응 임산부~ 응 어쩔~?'
이러한 생각들이 존재하는 한,
우리나라 출산율은 오를 기미를 보이지 않을 것이고 (물론 이미 심각한 상황이긴 하지만)
임산부 배려석이 비어져 있는 날은 여전히 손에 꼽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