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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카 May 29. 2024

평범했던 일상이 더 이상 평범하지 않아

입덧 지옥

참 감사하게도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뱃멀미나 차멀미 같은 멀미를 해본 적이 없다. 게다가 술을 잘 마시지 못해서 과음을 하는 경우도 없다 보니 사람들이 말하는 숙취가 무엇인지도 느껴보지 못했다.


하지만 임신하고서 찾아온 입덧은 '네 인생에 못해본 경험이란 없을 것이다!'라는 듯이 온갖 멀미와 숙취를 간접경험으로 절절하게 느끼게 해 주었다.


많은 임산부들이 겪는 입덧은 사람마다 다양하게 찾아오는데 보통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울렁거리고 무엇을 먹어도 울렁거리는 것을 입덧이라고 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먹어야 속이 괜찮은 입덧이 있고 (먹덧), 양치할 때마다 구역질이 함께 올라오는 입덧이 있고 (양치덧), 세상의 냄새란 냄새는 다 맡을 수 있게 되는 입덧(냄새덧)도 있다.


나는 강도의 세기만 다를 뿐 모든 입덧 증상들을 골고루 느꼈다. 그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던 입덧 증상이 있었는데 이는 가만히 있어도 속이 울렁거리는 것과 아주 작은 냄새마저도 콧속을 강렬하게 뚫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멀미가 이런 것일까 분명 내 몸은 가만히 의자에 앉아있지만 내 속은 험한 파도가 휘몰아치는 배 위에 있는 것처럼 저 혼자 울렁울렁거려 댔고 속절없이 메슥거리며 구토할 것 같은 기분이 자주 들었다.


앉으나 서나 눈감으나 뜨나 24시간 내내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기 위해서 뭐라도 먹어야 했건만 (공복이면 어째 더 심각하게 울렁거렸다) 먹을 수 있는 극소수의 음식조차도 마음껏 먹지 못했다. 천천히 꼭꼭 씹어서 삼키면 뭐 하나 금방 체해버리는 것을! 아주 적은 양의 식사를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속이 더부룩하고 꽉 막혀있어서 약국에서 판매하는 까*활명수와 같은 소화제가 간절했다. 한 병만 마시면 속이 뻥 뚫릴 것 같은데! 왜 못 마시는 것이야!


아무렇지 않게 즐기던 식사 시간들이 꾸역꾸역 모래알을 삼키는 고역으로만 느껴졌다. 그저 빨리 입덧이 끝나서 마음껏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개코'. 사람들은 냄새를 잘 맡는 사람들을 이렇게 칭한다. 나 역시 개코라는 소리 한 번쯤은 들어봤고 이로 인해 어디 가서 냄새로 지지 않는다고 자부했었다.


그러나 임신하고 맡는 냄새는 차원이 달랐다...!


그저 스쳐가는 냄새조차도 이 냄새가 무엇인지 세세하게 분석되어 콧구멍 속의 땀구멍 사이사이로 슉 박히는 느낌이란! 오밀조밀하게 뭉쳐진 냄새들이 바람결에 날리는 민들레 홀씨처럼 흐트러져서 하나씩 박히는 것이 어찌나 강한지 한 번만 맡았음에도 코가 아플 지경이었다. 게다가 이 냄새덧은 사람냄새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에게서 얼마나 많은 냄새가 나는 것인지 너무 잘 가르쳐 주었다.


꾸미기를 좋아하는 아주머니들은 향수를 아마 열 번은 뿌리시고 나오는 것 같다. 이들이 등장하면 저 멀리서부터 향이 진동하는데 분명 비싸고 좋은 향이라 할지라도 그들에게서 풍겨지는 향은 절대로 은은하지 않고 지독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진했다. 식당에서 마지막 한 숟가락을 들며 '이것만 먹으면 식사를 남김없이 할 수 있다!' 며 기쁨에 젖어 속으로 쾌재를 부르던 찰나에 점차 가까이 다가오는 그들의 향수 냄새에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못해 속까지 뒤집어질 것 같아서 채 먹지도 못하고 식당을 뛰쳐나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님아 제발 그 향수 좀 그만 뿌려주오..!


지나가는 아저씨들은 홀아비 냄새라고 불리는 그런 특유의 혼자 사는 남자들의 냄새가 났다. 이런 냄새는 모두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냄새이기도 하기에 임신 전에도 기피하였는데 임신하고 보니 유달리 더 진하게 느껴졌다. 지하철 안에서 그들의 냄새가 마스크를 뚫고 들어올 때의 피로감이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끔찍하다.


냄새덧은 뭘 하든 귀엽기만 한 남편조차도 상황에 따라 기분 나쁜 냄새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한 번은 잠자리에 들기 위해서 남편과 나란히 누웠을 때 얼굴을 향해 뿜어져 나오는 남편의 숨결이 거북하게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남편의 코와 입을 막아버린 일이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남편은 꽤나 충격 먹었는지 더욱 깔끔해졌는데 나로서는 매일 깨끗한 남편을 볼 수 있어서 한편으론 좋기도 했다. (남편 미안..)


진한 알코올 냄새는 음주가무를 즐기지 않는 이들에게는 그다지 좋지 않은 냄새다. 마치 과학실에 들어섰을 때 풍겨오는 알코올냄새는 알싸하고도 기분 나쁜 이질감을 선사한다. 게다가 담배냄새나 식당의 음식 냄새들이 한데 섞여 풍겨져 나온다면 그야말로 최악 중의 최악이라 꼽을만하다.


어느 날 남편이 가볍게 술 한잔 걸치고 집에 들어왔던 적이 있다. 당시 임신테스트기로 임신 사실을 얼핏 인지만 하던 터라 남편이나 나나 냄새덧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띠리리 경쾌한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리며 남편이 집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나는 탁구공이 튀어 오르듯 남편과 반대방향으로 몸이 반사적으로 튕겨져 나갔다. 헨젤과 그레텔이 빵을 떨어뜨리며 흔적을 남긴 것 마냥 그는 지나온 모든 곳의 냄새를 끌어왔기 때문이다. 정말 소량의 소주만 먹었다고 주장했으나 남편이 들어서는 그 순간 거실에 진동하던 소주의 진하디 진한 알코올 냄새와 후라이드 치킨의 진득한 기름냄새는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다. 이처럼 입덧으로 인한 냄새에 대한 예민함은 '사람이 이 정도면 개는 얼마나 냄새를 잘 맡는 거야?'라는 생각이 슬며시 들게 할 정도다.


세상 모든 냄새에 대해서 느낄 수 있는 곳은 단연 출퇴근 시간대의 지하철 안이다. 지하 1층에 커피매장이 굉장히 많은 환승역을 지나칠 때면 진하게 볶은 커피콩 냄새가 풍겨져 왔고, 큰 시장이 있는 역을 지나칠 때면 할머니들의 장바구니에 가득히 담긴 것이 생고기인지 생선인지 알 수 있는 비린내가 났다. 정거장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서도 냄새가 났는데 무엇이 그렇게 힘든지 거칠게 내뿜는 누군가의 뜨거운 숨냄새, 스쳐 지나가는 이의 시큼한 땀냄새, 빨래가 채 마르지 않았을 때 나는 특유의 쿰쿰한 냄새, 퍼프로 얼굴을 얼마나 두드려댔을까 싶은 진한 화장품 냄새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타는 지하철인 만큼 온갖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물론 하나같이 좋은 냄새는 아니었던지라 '왜 인간들이란 냄새나는 존재인 것인가' 하는 심연의 시간을 가지며 어서 목적지에 도착하기만을 바랬었다.


임신 전에는 막연히 배가 많이 불러서 힘든 것만 생각했건만 막상 임신하고 보니 초기부터 가시밭길이다. 게다가 입덧은 혼자만 느낄 수 있는 증상이고 임신 초기에는 배가 전혀 나오지 않아서 임산부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그저 모든 괴로움을 오롯이 혼자서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새삼 이 과정들을 거쳐온 모든 엄마들이 대단하게 보였다. (근데 이렇게 힘들다고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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