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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회전문가 Jun 28. 2023

가끔은 일부러 후회할 짓을 만들기

후회를 활용하는 법

또 시작이다.

또다시 아무것도 하기 싫고, 어떤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먹고 싶은 것도 없고, 영화나 드라마 따위도 재미없고, 누워있나 앉아있나 몸이 베베 꼬이고, 어떤 말을 듣고 싶지도 않은 아 - 다 싫어 싫어 모드.


이 모드는 우울모드와는 확연히 다르다. 우울이 번뇌와 싸우는 거라면 싫어 모드는 번뇌가 아니라 그냥 무의 상태다. 조금 더 길고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멍-하고 맹-한 무기력의 상태. 이런 날은 꼭 할 일이 없다. 할 일이 있다한들 미룰 수 있는 한 그것은 오늘의 할 일이 아니다.


이런 날 내가 하는 일은 하나. 침대에 누워 핸드폰만 바라보는 것인데... 문제는 핸드폰에도 재미있는 게 없다는 것이다. 핸드폰을 끄고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눈을 감아본다. 잠도 오지 않는다. 다시 눈을 뜬다. 괜히 입으로 "아~~~~"소리를 내본다. 바닷속 해초도 나보다는 알차게 살 것이다.


바쁘게 사는 날이 있으면 이렇게 아무 생각 없는 날도 있어야지.라고 짧게 생각해 보지만 평소에도 그다지 열심히 살지 않아서인지 합리화는 되지 않는다. 그동안 보았던 자기 계발서의 문장들이 비눗방울처럼 부풀어올라 눈앞에서 터진다. 오늘이 인생의 가장 젊은 날, 내가 쉽게 흘려보낸 하루는 누군가가 간절히 원하는 하루,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인생이 바뀌길 바라면 미친 사람이다 웅앵웅. 그 어떤 말들도 내 마음은커녕 귓바퀴에도 닿지 않는다. 안 되겠다. 최후의 방법을 써야겠다. 내가 가장 잘하는 걸 하자.


그건 바로, 후회할 짓 만들기.


핸드폰을 열어 가장 친한 친구에게 문자를 넣는다. '수영장 고. 가능?' 이제 난 어쩔 수 없이 씻고, 옷을 입고, 수영복을 챙겨서, 운전을 해 수영장을 가게 될 것이다. 물론 친구와 약속이 잡히는 순간 후회에 몸부림치고 준비하는 내내 소리를 지르며 가기 싫다는 말만 오천 번 얘기하겠지만, 어찌 됐건 뭐라도 하고자 하는 목표는 달성한 것이니 거기서부턴 내 관활이 아니다. 그럼 누구 관활이냐고? 그건 5분 뒤에 나에게 맡기자.


만약 친구가 시간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럼 다음과 같은 문자를 보내면 된다. '내가 만약 오늘 수영장에 가서 인증샷을 찍어 보내지 않는다면 너한테 10만 원을 줄게.' 뼛속까지 자본주의 인간인 나는 이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는 날이 있고 그날이 바로 오늘이다.  


천남성이라는 식물이 있다. 천남성은 우리나라 숲 속에 나는 외떡잎식물로 빨갛고 예쁜 열매를 피우는데 그 열매는 독이 있어, 복용할 경우 위장과 구강 점막에 강한 통증을 유발하며 심한 경우 호흡곤란으로 사망에 이르게 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과거에는 사약의 재료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런데 신기한 점은, 가공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몸에 있는 담이나 용종, 가래 등을 삭이는 효과가 있어 보약에도 쓰인다는 것이다.


후회는 천남성과 같다. 어떻게 쓰냐에 따라 사약이 될 수도, 보약이 될 수도 있다. 만약 약속을 잡지 않았더라면 오늘 잠자기 전까지 후회했을 것이다. 약속을 잡은 덕에 후회의 시간이 짧아졌고, 어쩌면 집에 돌아오는 길엔 친구와의 만남이 너무 즐거운 나머지 '나가길 잘했다'라고 생각이 바뀔지도 모른다.


다행히 오늘은 친구도 시간이 돼 함께 수영장을 가기로 했다. 지금 시각은 4시 32분. 친구와는 6시에 만나기로 했고 수영장까지는 대략 40분이 소요되므로 준비하는 시간 20분을 생각하면 20분 뒤에는 일어나야 한다. 그렇게 계산을 하고 나니 남은 20분이 더없이 소중하고 편안하다. 분명 아까도 지금도 계속 똑같이 쉬고 있는데 확실한 데드라인이 생기니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벌써 보약을 먹은 듯 마음이 든든하다.


쉬려고 했던 20분마저 포기하고 친구와 함께 먹을 미숫가루를 준비하기로 한다. 부엌 창문으로 비치는 바깥의 날씨가 화창하다. 점점 기분이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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