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뒤끝이 너무 길어
보복운전을 당했다. 정속주행을 하고 있는데 오른쪽 차선에서 초록색 차가 깜빡이 없이 들어와 부딪힐 뻔 해 두어 번 경적을 울렸더니 옆으로 바짝 붙어 창문을 내린 뒤 쌍욕을 뱉어댔다. 평소라면 맞대응을 했을 텐데 당시 임신 8개월 차라 싸우지 않는 편이 나을 듯싶어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그러자 그 차는 다시 뒤로 가 경적을 울려대고, 쌍라이트를 켜고, 우회전하려는 내 차를 앞질러 진로를 방해한 뒤 통쾌하다는 듯 유유히 떠났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순간의 황당함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 참지 말 걸. 괜히 평소와 다르게 참아서 화를 키운 것 같았다. 아까 같이 버럭 했으면 잊어버렸을 텐데, 무대응으로 응답해 상대방이 날 만만하게 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는 생각에 더 큰 스트레스를 받아버렸다.
그 새끼 때문에 하루를 망치지 말자. 그게 걔가 바라던 일일 테니까. 그런 마음으로 몇 번이고 마음을 진정시켜 보았지만 분노는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다음 날, 다다음날까지 출근을 하기 위해 운전대를 잡으면 그 새끼 얼굴이 떠올랐다. 젠장. 결국 참지 못하고 인터넷에 '보복 운전자 보복하는 법'을 검색했다. 오- 블랙박스 영상을 증거 삼아 보복운전을 신고할 수 있군. 비로소 마음이 편해지고 웃음이 나왔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참 뒤끝이 길다. 당최 좋게 좋게 넘어갈 줄 모르고, 당한 것을 쉽게 잊어버리지 못한다.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안 좋은 일들은 빨리 털어버리는 게 좋을 텐데 그게 참 안된다. 왜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나의 하루는 우는 날보다 웃는 날이 더 많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었던 날만 자주 떠오른다.
기분을 좋게 끌어올리는 일은 시지프스의 형벌과 같아서 아무리 애써서 돌을 밀어 꼭대기로 올려놓아도 금세 굴러 떨어지고 만다. 올리는 건 어렵고 오래 걸리는데, 내려가는 건 빠르고 쉽다. 멀어지는 돌을 보며 무력감에 휩싸이지만 이 일을 그만둘 순 없다. 영원히. 나는 무슨 죄를 지었나. 어떤 나쁜 짓을 했길래 이런 벌을 받아야 하나. 오 이런. 다시 돌이 떨어지고 있다. 아래로. 더 아래로.
이럴 땐 재빨리 다른 생각을 해야 한다. 그렇담 가만히 눈을 감고 도마뱀이 되어볼까. 덫에 걸려버린 나의 꼬리. 이 거추장스럽고 묵직한 꼬리를 뚝. 하고 끊어낸 후 전력을 다해 뛰는 상상을 한다. 다시는 뒤돌아 보지 않으리란 굳은 다짐을 하고 팔다리를 힘껏 흔들며 도망친다. 한 때는 내 것이었지만 이제는 아닌 나를 두고 간다.
아, 그래서 신고는 잘했냐고? 아니요. 블랙박스의 영상저장기간은 꼴랑 이틀뿐이었고 3시간 차이로 영상이 삭제되고 없어져버렸다. 운 좋은 새끼. 근데 그거 알아? 너의 운, 여기에 다 쓴 거다. 이제 넌 평생 재수 없을 걸.
꼬리가 다시 자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