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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밑에서 자치의 해답을 찾다”

호보 타케히코 명예교수 강연(1)

by 월간옥이네

'“주민이 주인이다” 일본 정촌에서 배우는 자치의 힘' 기사에서 이어짐

https://brunch.co.kr/@monthly-oki/275



일본과 한국의 지방자치 구조는 겉으로 보면 유사하지만, 실제 법적 기반과 운영 원리, 주민 참여 방식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시마네대학 명예교수인 호보 타케히코 씨는 강연 서두에서 “도도부현-시정촌 구조*를 갖는 일본의 자치 체계를 한국과 비교하며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짚으며, 강의 목표를 분명히 밝혔다.


“지방정부가 주민 의지에 따라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려면 어떤 구조와 원리가 필요할지, 주민참가형 지역자치의 이상형을 함께 상상해보고 싶습니다.”


*도도부현-시정촌 구조: 우리의 광역시도-기초시군 단위에 대응된다고 보면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호보 교수가 지적하듯, 실제 규모는 물론 법적 권한 등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다.



IMG_3656.JPG 호보 타케히코 명예교수



헤이세이 대합병 이후의 그림자

호보 교수는 1999년 일본 지방자치법 전면 개정과 이어진 2000년 ‘지방분권추진일괄법’ 시행이 일본 자치 구조에 큰 전환점을 가져왔다고 설명한다. 이 개정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주종관계가 아닌 대등한 관계’임을 다시 확인하는 계기였다. 그러나 이후 전국적으로 추진된 ‘헤이세이 대합병(1999~)’은 또 다른 문제를 낳았다.


“당시 시정촌 합병은 행정 효율성과 인건비 절감을 목표로 추진됐습니다. 실제로 800명이던 지자체 공무원 수는 300명까지 줄었고, 자치단체 수는 2천232개에서 1천718개로 거의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습니다.”


정촌장 전국 모임은 합병 효과를 “의사결정이 빨라지고, 직원 전문성이 강화됐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주민 삶에 미친 영향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합병 이후 기존 정촌 단위 사무소는 ‘지소(支所)’로 격하되며 실질적인 결정 권한을 상실했습니다. 이로 인해 말단 지역의 자치 역량이 약화됐을 뿐 아니라, 주민과 행정 간 접점 또한 급격히 줄어들었죠. 정촌마다 고유하게 운영되던 업무나 지역 특성에 맞는 활동이 합병을 통해 획일화되거나 사라졌고, 돌봄 등 필수 영역에서는 인력 감축이 이뤄졌습니다. 작은 지역 행사는 대규모 통합 축제로 바뀌면서 주민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줄었고, 이전에는 정촌에서 처리하던 행정 민원조차 이제는 본청까지 가야 해결할 수 있는 일이 되었죠. 주민들이 체감하는 ‘안심감’은 줄어들고, 일상 속 불편은 오히려 더 늘어난 셈입니다. 무엇보다 정촌 단위에서 행정과 민간이 긴밀하게 소통하며 지역을 함께 꾸려왔던 그 연결망이, 합병 이후 점점 옅어지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로 제기되고 있습니다.”


행정과 주민 사이의 신뢰와 연대는 점차 사라지고, 공무원 수 감소로 돌봄과 복지 등 생활 밀착형 서비스는 취약해졌다. 중심지는 상대적으로 발전하는 반면, 주변 지역은 더욱 빠르게 쇠퇴하는 ‘주변부 소외’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는 게 호보 교수의 지적이다.


다시 떠오르는 ‘합병론’, 대안은 ‘작은 거점’?

최근 일본에서는 지방자치단체의 대규모 합병을 촉구하는 발언이 다시금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난 2월 14일, 무라카미 세이이치로 총무대신은 “전국 자치단체 수를 300~400개 수준으로 줄여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했다. 그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현청조차 필요하지 않다”고 덧붙이며, 지방행정의 효율화를 명분으로 한 대규모 개편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 같은 발언은 일본 내에서 시정촌 합병 논의가 다시 본격화되는 신호탄으로 읽힌다. 1999년 헤이세이 대합병 이후 다소 주춤했던 합병론이 재차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다. 주민 밀착형 자치의 회복을 고민하는 현장에서는 이를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 같은 배경 속에서 대안으로 제안된 것이 ‘작은 거점’ 전략이다. 초등학교, 공민관*, 돌봄시설, 문화체육시설 등을 하나로 묶은 생활권 중심 거점을 마련해 주민들의 이동 부담을 줄이고, 공동체 기능을 다시 강화하겠다는 구상이다(우리로 치자면 현재 농촌 지역에서 추진되고 있는 생활SOC 사업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겠다).

하지만 호보 교수는 이 또한 “일시적 효과에 그칠 수 있다”고 지적한다. 합병 이후 교통 단절, 병의원 이용, 생필품 구매 등 일상생활의 불편이 커진 상황에서, 이른바 ‘작은 거점’은 그저 주민들이 마을을 당장 떠나지 않도록 잠시 붙잡아두는 임시적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작은 거점이 있다고 해서 농촌이 되살아나지는 않습니다. 진정한 해법은 그 지역에 사는 주민들이 자신의 삶터에서 문제를 인식하고, 스스로 해답을 찾아가는 데 있습니다.”


*공민관: 일본 사회교육법에 따라 지역사회 주민의 학습을 지원하기 위해 설치된 시설로, 우리나라 평생학습원에 해당하는 지역 기반 교육시설이다. 다만 일본의 공민관은 주민 자주 조직이 직접 운영하며, 지자체 산하 교육위원회 소속으로 설치된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와 구조 및 운영 원리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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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이 만든 마을계획, 자치의 출발점이 되다

호보 교수는 주민이 스스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의 사례로 주민참여형 지역계획을 소개했다. 호보 교수 자신이 주민참여형 지역계획 활동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던 시마네현 카키노키촌 이야기다.


1989년, 인구 2천 명 규모의 농촌 마을인 카키노키촌은 전면적인 주민참여 방식으로 마을계획을 수립했다. 이후 이 계획은 지역 전체의 종합계획 수립으로까지 이어졌고, 주민이 주도한 마을 점검과 계획 수립이 어떻게 실질적인 자치로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는다.


처음 이 사업은 행정이 주도한 것이 아니었다. 공민관을 중심으로 시작된 주민들의 자발적 활동이었다. 당시 호보 교수는 지역자치 운동을 하는 다른 교수, 활동가들과 함께 전국 59개 지자체를 순회하는 강연회를 조직하고 있었다. 주제는 ‘농촌 문제 대응’. 그 과정에서 카키노키촌은 공민관 활동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마을 교육과 마을 만들기 활동을 진행하고 싶다는 강력한 제안을 내놓았다. 이곳은 시마네대학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지역이었지만, 교수진은 월 2회씩 현장을 찾아 주민들과 함께 마을 상황을 점검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먼저, 마을 상황을 확인하는 집락점검을 실시하고, 이후 카키노키촌의 6개 공민관 단위로 ‘집락계획위원회(마을계획위원회)’를 구성했다. 각 위원회는 10년 단위 마을계획을 수립하게 되는데, 이들은 학습모임과 집락점검을 병행하며 마을의 현 상황과 미래에 대한 토론을 이어갔다. 위원회 구성 시에는 노인 중심의 인선이 되지 않도록 여성과 청년의 참여를 적극 유도하기도 했다.


집락점검은 고령자 복지, 자살률, 일자리, 어린이 육아환경, 자연환경, 교통안전 등 실생활과 직결된 주제로, 그 항목만 해도 100개가 훌쩍 넘을 정도. 워낙 방대한 양이지만 가능한 모든 주민의 이야기를 듣고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기 위한 장치였다.


이렇게 점검을 통해 도출된 문제는 원인 분석, 해결 희망사항, 실현 우선순위, 실행 주체까지 정리해 이를 바탕으로 마을 전체의 중장기 계획이 수립될 수 있었다. 주민 의견을 한 집 한 집 직접 찾아가 들었고, 특히 여성과 어린이의 목소리도 빠짐없이 담았다는 게 호보 교수의 설명. 어린이들은 지역 지도를 들고 통학로를 돌며 위험지역을 직접 점검하는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 과정은 2~3년에 걸쳐 진행됐고, 점검결과는 소책자로 제작돼 전 세대에 배포됐다. 이후 행정과 협의해 예산이 필요한 사업의 우선순위를 조정하고 실현 가능한 과제를 추진하는 식으로 활용됐다.


주민이 주도한 복지와 돌봄 체계

카키노키촌의 또 하나의 성과는 돌봄 복지체계다. 자살률과 고독사 문제 해결을 위해 지자체 차원에서 특별팀을 구성했고, 이 팀은 행정이 아닌 외부 독립조직으로 운영됐다. 개인정보 보호를 철저히 고려한 운영 방침 때문이었다. 팀에는 요양보호사, 지역사회 보건인력, 행정 실무자 등이 참여하며 민간과 공공이 협력하는 돌봄 체계가 마련됐다.


카키노키촌은 이 과정에서 고치현 오오츠키정 사례를 참고하기도 했다. 오오츠키정의 경우 행정과 주민이 함께 고령자를 돌보는 구조를 갖춰 자살률이 거의 없는 마을로 알려져 있다. 호보 교수는 “이처럼 주민이 직접 마을을 점검하고 계획수립을 주도해 복지 정책을 수립해가는 구조야말로 지속가능한 지역 돌봄의 해답”이라고 강조했다. 바로 이런 주민 자치 활동은 복지 영역에 그치지 않고, 지역사회 전반의 과제를 함께 해결하며 모두가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어 가는 데 핵심 역할을 할 수 있다.


카키노키촌의 마을계획은 결과적으로 유기농업 확대, 자급적 식생활 확산, 지속가능한 자연순환 구조 등에서도 뚜렷한 성과를 보여줬다. 정부가 추진하는 대규모 농업 중심 ‘대량생산-대량판매’ 모델과는 달리, 카키노키촌은 식량 자립과 지역 순환을 중심으로 한 지속가능한 농업모델을 구축하며 독자적인 길을 개척한 것.


1993년부터 1999년까지 7년 동안 총 131명의 신규 이주자를 유치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연평균 11세대, 약 19명이 마을로 이주한 셈이다. 호보 교수는 “국가와 지자체의 관계 설정도 물론 중요하지만, 진짜 출발점은 결국 지역 주민 스스로 ‘어떤 마을을 만들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시작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괴테의 말을 인용했다.


“‘네 발 밑을 파라, 거기서 맑은 샘물이 솟으리라.’”


자치는 멀리 있는 이상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딛고 선 땅에서 시작된다. 그 땅을 딛고 사는, 주민의 손에서부터 말이다.


월간 옥이네 94호

박누리

사진 김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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