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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lcefarniente Jul 03. 2018

벵갈루루의 색깔


"너 인도 가면 진짜 엄청 깜짝 놀랄 거야.

도시가 얼마나 다양한 색깔로 가득 찼는지 넌 상상도 못 할걸. 인도 사람들은 색깔을 사랑해."




색깔에 있어 나는 참 단조로운 사람이다.  

나이가 들며 배운 인생을 쉽게 만드는 몇 안 되는 방법 중 하나인 '내 거 만들기'-경험으로 나를 편안하게 만드는 선택을 알아나가고 선택을 해야 할 순간에 이에 기대는 것이다. 내가 임의로 내린 정의다.-의 일환으로 나는 늘 네이비, 검정, 흰색 혹은 이들이 절묘하게 조화된 스트라이프를 고른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수년 전부터 나는 '이번엔 꽃무늬도 사보고, 노란색 옷도 사봐야지' 다짐을 하고 쇼핑을 가서는 꼭 네이비 셔츠 혹은 셔츠형 드레스 앞에 멈춰 서서 '음 내 거네.'하고 있었고 그때야 겨우 뭐라도 하나 건졌다는 안도와 함께 집에 돌아와 옷장 속 네이비 컬렉션을 차근차근 채워나갔다.


이러한 나를 알고 있는 함께 온 인도인 친구는 출발하기 전부터 나에게 인도의 화려하고 다양한 색깔을 보여줄 생각에 그리고 그 색깔들을 나에게 입힐 생각에 신이 나 있었다.


집-고모댁-사무실(집과 사무실 중간에 고모댁이 있고 집에서 사무실까지 걸어서 5분 거리이다)만을 다람쥐처럼 왔다 갔다 하며 일주일을 보내고 주말이 되어서야 나는 친구가 그토록 말하던 인도의 색깔들을 보게 되었다.




첫 번째 일요일,  


나를 포함한 총 8명의 여성들은 벵갈루루에서 가장 유명한 식당이라는 'Vidyarthi Bhavan'에서 아침을 먹기 위해 아침 일찍 올라(Ola, Uber와 같은 서비스)로 부른 희고 낡은 벤에 올라타 시내로 향했다.


차 안에 감돌던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아침밥을 먹는 것을 미션처럼 느끼게 만든 것을 설명하기라도 하듯,

그리고 명성에 걸맞게 이미 식당 앞은 인산인해였고 우리는 2시간가량을 기다려야 했다.



- 인도에서는 보통 손으로 음식을 먹기 때문에 음식 사진을 찍기가 쉽지 않다.(음식이 나오면 참지 못하고 한입 먹고서야 '아 맞다, 사진'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핑계가 맞지만 맛을 보면 멈출 수 없을 정도로 맛있었다고 하면 조금 더 설득력이 있어질까?) 다시 가면 사진을 반드시 찍겠다고 다짐했으나 이 곳에 다시 갈 기회는 생기지 않았다. 다른 곳에서 음식을 몇 번 사 먹어본 이후에야 이 곳 음식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알 수 있었고 음식 사진을 남기지 못했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마살라 도사(Masala Dosa, 도사 안에 각종 향신료(마살라)로 양념한 으깬 감자를 넣은 메뉴)를 추천한다. 어디에서나 시켜먹을 수 있는 흔한 메뉴이지만 이곳의 마살라 도사가 유달리 맛있었다. 딸려 나오는 처트니와 삼바(Sambar, 렌틸을 넣은 남인도식 묽은 주황색 커리)를 찍어먹으면 된다.-


긴 대기시간에 굴할 리 없는 우리 여덟은 근처에서 따뜻하고 달달한 필터커피를 길에 선채로 한 잔씩 털어 마시고 이른 아침의 배고픔을 달랬다. 그리고 남은 시간을 즐겁게 보내기 위해 손에 손을 잡고 비장하게 길을 건너가며 -길을 건너야 할 때면 왠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옆 사람의 손을 붙잡게 된다- 근처에 있는 꽃시장으로 향했다.





복잡한 도로에 연결된 작은 골목에 불과한 꽃시장은 이제야 막 깨어나는 중이었다.

일요일 이른 아침이라 군데군데 문이 닫힌 가게들이 있었음에도 그 좁은 골목에 다다른 순간 나는 '밀려온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눈이 부신 색깔과 향기에 압도되었다. 잎이나 줄기 없이 오로지 꽃만을 가득 담은 자루를 양손에 들고 사방에서 '쏘리'를 외치며 사람들 사이를 바쁘게 움직이는 배달부들과 꽃을 실로 꿰거나 엮고 있는 상인들의 분주함마저 아득하게 덮어버릴 정도로 찬란한 색깔들이었다.




꽃들 만큼 화려한 색깔의 사리와 쿠르따를 입은 사람들은 이러한 꽃들 속에서 재잘거리고, 꽃향기를 맡고,

재스민 꽃 장식을 사서 머리에 두르거나 핀으로 꽂고는 즐거워했다.  


-이곳에서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항상 진한 재스민 향기가 나는데 처음에는 대부분 사람들이 같은 섬유유연제를 쓰는 줄로만 알았다. 알고 보니 섬유유연제가 아닌 머리에 꽂은 재스민 꽃에서 나는 향기였다.-




    낯선 곳에 도착하면 길을 걷는 것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활동마저 스트레스로 느껴지는 순간이 많다. 벵갈루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초행길에 길을 잃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도 걷다가 다치치 않아야 하며 -이곳에서도 도착하자마자 길에 널브러져 있던 벽돌에 발가락을 한 차례 다쳤다-,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의연한 척해야 하고, 교통사고의 위험이 있으므로 곳곳에 신기한 것 투성이이지만 이에 정신이 팔려서도 절대 안 된다. 

집 근처 마트를 가는 것 마저 오감을 집중시켜 수행해야 할 긴박한 임무처럼 느껴질 때가 종종 있어 주변을 보는 것은 한 동안 쉽지 않다. 

   내가 '이제 이곳에 조금 익숙해졌구나'하고 느끼는 때는 비로소 그곳의 색깔이 보이는 순간인 것 같다. 어느 순간 서서히 길 위의 사람들의 얼굴이 보이고 그들의 일상과 이에 어우러진 색깔들이 보일 때, 그제야 나를 '둘러싸고' 있던 것들이 인식되고, 또 그제야 내가 그 모든 것들과 교감하고 있음을 느낀다. -갑자기 시간이 느리게 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그 어떤 순간이 있는데, 벵갈루루에서는 꽃시장에서 처음 그 기분을 느낀 듯하다.-



처음 도착해서 느낀 삭막함과 긴장감을 돌이켜 생각하면 피식 웃음이 날 정도로 벵갈루루는 화려하고 다양한 색깔로 가득 찬 도시이며, 눈이 시리도록 밝고, 무작위 하지만 이상하게도 조화로운 이 색깔들은 어쩌면 이 도시 그 자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수많은 인종(티베트와 몽골, 혹은 이에 인접한 지역에서 온 우리와 닮은 인도인들도 많다), 종교(힌두, 이슬람, 기독교, 천주교 등)와 삶의 방식이 공존하는 곳. 상상 이상의 무질서와 사람들의 친절이 공존하는 곳.

-무뚝뚝하고 무관심한 듯 하지만 처음 만난 모르는 사람들도 외국인인 내가 손해나 차별 없이 대우받을 수 있도록 늘 챙겨주는데 나는 이게 왠지 더 어색하면서도 귀엽고 정감 있게 느껴졌다-

서로에게 완전히 섞여 든 것은 아니지만 이 색깔들은 한 공간에 어우러져 도시의 색깔을 만들고 이 도시에 대한 기억을 그 아득한 색깔로 남기는 것 같다.


다시 한번 나는 '이곳의 다양한 색깔들을 내게 보여주고 입혀주고 싶다'던 친구를 생각하며 이제야 그녀가 이 말을  단순히 내가 파란 옷만 입는 사람이기 때문에 한 말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 말 보다 더 '네가 벵갈루루를 제대로 보고, 느끼며 이에 흠뻑 젖어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깝게 담아낼 수 있는 말이 있을까.   


한 없이 삭막한 정경 속에서 흙먼지에 눈을 따가워하며 소매로 입을 막고 바삐 걷다가 이렇게 불쑥 나타나는 색깔들을 보면 왠지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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