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에 떠난 칠레 워킹홀리데이10.가르시아 마르케스
세상에서 가장 호화롭고 사치스런 독서는, 그 책이 쓰여졌거나 관련된 장소에서 읽는 것. 그래서 칠레에 있는 동안 최대한 많은 사치를 누리고자 마음 먹었었는데. 무심코 책장을 기웃거리다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이라는 책을 읽었다. 항상 흥미로운 책을 펼치면 가장 먼저 목차를 살피고,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는데, 이 책의 저자는 "가르시아 마르케스", 콜롬비아 태생, 옛날 옛적 백 년의 고독을 뜻깊게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설레는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뭐랄까. 굉장히 내가 알고 싶었던 흥미로운 주제였다. 분명 나도 나이를 먹게 될 것이고, 아직 겪어보지 못했기에 흥미로웠던 노인(사랑과 고독, 늙음과 성)에 대한 이야기. 이 소설에서는 사랑이라고는 매음굴에서 밖에 하지 못했던 한 노인이 14살 소녀에게 우연히 사랑의 감정을 느끼면서 시작된다. 터무니없지만, 터무니없어 보이지 않게 빠져들었다. (옮긴이의 말을 빌려, 두 사람 사이의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관계,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관계처럼 마술적인 관계가 이루어진다) 그게 작가의 힘인가 보다.(가끔 주인공의 위트 있는 유머나 실소하게 만드는 장면 또한 맛깔스러웠다)
작가의 요지는 이렇다. 열네 살에 불과한 델가 디나를 육체적으로 알지도 못 하지만, 사랑을 느끼는 주인공을 통해 ‘사랑은 상호적이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옆에 있으면서 그를 느끼는 것만으로 족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즉, 그렇게만 해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난 아직 세상을 다 살아내지 못해 모르겠다. 그러길 믿을 뿐이다.
... 그 작품들을 통해서 세상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힘은 행복한 사랑이 아니라 버림받은 사랑임을 알게 되었다.
그 어떤 사랑에 관한 책들 중에서 이렇게 말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더 와 닿는다.
... 나는 고통이 나를 어디까지 타락시켰는지 알게 되었다. 사춘기 소년처럼 앓으면서 스스로도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 되어 있었다. 전화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고, 글을 쓸 때도 수화기를 내려놓지 않았으며, 전화벨이 울리기라도 하면 그녀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달려가 수화기를 낚아채곤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뒤에야 전화에는 ‘심장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인과 소설가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고 느끼지 못하는 것들을 느낀다고 했던가. 너무나도 간단한 표현이면서도 문자 그대로 수용할 수 있게 만드는, 공감하게 만드는 구절이었다. 그리고는 소설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태양은 공원의 편도나무 사이로 떠올랐고, 강이 마른 탓에 일주일이나 늦게 도착한 하천 우편선이 포효하면서 항구로 들어왔다.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건강한 심장으로 백 살을 산 다음, 어느 날이건 행복한 고통 속에서 훌륭한 사랑을 느끼며 죽도록 선고받았던 것이다.
진정한 사랑을 겪어 보지 않았다면, 진정한 삶을 살아내지 못한 게 정말인 걸까. “진정한 사랑과 사랑하는 경이를 맛보지 않고는 죽지 말라"라고 주인공에게 충고하는 이 책을 보면 그 답은 자명하게 나와 있는 듯하다.
내 책 중에서 이십 년도 지나지 않은 사건들을 서술한 책은 단 하나도 없을 겁니다. 나는 모든 개인적인 경험이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아주 긴 침전의 과정을 통해서만 시적인 무게를 지니게 되지요. 시간과 기억과 노스탤지어만이 줄 수 있는 시적인 무게 말입니다.
이 소설 역시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잠자고 있던 아름다운 여인을 일곱 시간 동안이나 지켜보며 구상하게 된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어떤 누가 아무런 방해(스스로부터도)를 받지 않고 처음 만난 여인을 7시간이나 바라볼 수 있을까.
사실 이 책은, 까사 아르볼의 책장에 고요히 꽂혀 있던 ‘칠레의 모든 기록’ 이라는 책을 먼저 접하고 읽게 되었다. 칠레의 피노체트 독재 정권 시절, 12년 간 해외로 추방되었던 애국심 가득한 감독의 칠레 잠입기를 르포 형식으로 서술한 흥미진진한 책이었다. 덕분에 칠레에 대해 더욱 더 사실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되었고, 뜻 밖에도 이 의미 깊은 사건을 책으로 훌륭하게 풀어쓴 작가가 가르시아 마르케스였다.(까사 아르볼의 책장에는 흥미로운 책들이 이렇게나 많다)
폭력으로 점철된 20세기 전반기의 콜롬비아의 정치적 환경 속에서 살아온 마르케스는 금세기 최대의 걸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작품에서 중남미의 정치적·사회적 현실에 대한 풍자를 신화적인 수법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현대의 중남미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혈육들의 모습을 이 작품의 등장인물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두산백과)
물론 콜롬비아 태생이지만, 남미 대륙에 대한 애착이 강했고, 칠레 독재 정권 시절 깊숙이 관여하며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것을 전 세계적으로 입증 시킨 작가이다. ‘백년의 고독’ 이라는 작품으로 유명하기도 하고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 확실히 그냥 느끼는 남미와 그들로부터 태어난 문학을 통해 그들을 느끼는 것 또한 다른 듯 하다. 그냥 왔다가는 칠레 워홀이 아니라, 남미 대륙, 그리고 스페인어권 첫 국가의 워홀인 만큼 좀 더 다양한, 많은 것들을 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