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칠레워홀러 Mar 27. 2020

먼 타지에서 만난 누군가의 부모님, 그리고 아들

서른 살에 떠난 칠레 워킹홀리데이11.그리움

일주일 여 동안 손님으로 계셨던 중년의 한국인 부부 손님이 계셨었다. 엄마, 아버지와 같은 나이셨고, 나 역시 큰 아들만한 나이였다. 한 눈에 봐도 참, 여유 있어 보이셔서 좋았지만 딱히 말 섞을 일은 많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볕 좋은 토요일 오후, 거실에서 마주친 아저씨께 반갑게 인사 드렸더니 대뜸 뭐가 가장 먹고 싶냐며 물어보셨다. 고민할 새도 없이 치킨이라고 대답했더니 그날 밤 두 마리나 사주셨고, 처음으로 칠레 소주 피스코를 레몬에 맛있게 타 마시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이런 저런 당신 이야기를 들려주면서도 끝에는 항상 ‘아이고, 내가 말을 하다 보니 길어졌네.’ 라며 부끄러운 듯 끝맺었다. 당신도 뭐든지 늦게 시작했고, 그만큼 열심히 살았고, 지금은 없이도 삶을 즐기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며 응원해 주셨다. 첫 인상 만큼이나 좋은 분들이셨고 자연스레 나도 저렇게 나이 먹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 라는 꿈. 나이를 먹으면서 가장 두려운 게, 내 경험에 반추해 모든 것을 단정 지어버리고는, 시간이 지날수록 나만의 벽에 갇혀버리는 그런 안하무인 같은 꼰대가 되어 버린 내 모습이었다. 



 





피스코에 거하게 취해... 불쑥, 고백해버렸다. ‘아저씨처럼 나이 먹고 싶어요.’ 평소와 다름없는 토요일 저녁이었지만, 나에게도 그들에게도 분명 잊지 못 할 산티아고의 밤이었으리라. 당신도 말미에 툭 말했다. ‘우리 아들이랑도 하지 못 했던 말들을..’ 

우리 아버지도 저런 마음이었을까. 자식에게 해줄 말은 산더미지만, 괜히 부담될까, 더 고민 속에 던져두진 않을까 무심한 척 그렇게 삼켜버렸던 수많은 찰나의 순간들과, 응원과, 걱정과, 못마땅함과, 바람과,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
 


 아름답지만 왠지 모르게 모든 게 그리운 밤이었다.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한 걸 보니, 나도 나이를 먹고 있구나 라고 느꼈다. 그렇게 이틀 여를 보내고 두 분이 떠나시기로 한 날, 갑작스레 아저씨께서 2만 페소 짜리를 꾸깃꾸깃 주시며 치킨 한 마리 더 사 먹으라고 하셨다. 처음엔 괜찮다고 손사래 쳤지만, 이내 받아들고는 치킨 대신 그토록 가고 싶었던 발파라이소를 가겠다고 했다. 나보다 먼저 가보셨던 두 분은 좋은 생각이라 하셨고 우리는 서로의 안녕을 빌었다. 지구 반대편, 이 곳에 있지 않았더라면 만나지 못 했을, 그리고 느껴보지 못 했을 특별하지만, 평범한 하루였다.


작가의 이전글 칠레에서 만난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