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에 떠난 칠레 워킹홀리데이7. 나의 네루다
요즘 이북을 통해 "네루다 자서전"을 읽고 있다. 역시나 시인의 자서전답게 뭔가 소설 같으면서도 여행 기행문을 떠오르게 만든다. 그의 생 역시 팔 할이 시와 여행이었기 때문이리라. 페이지 수도 방대하여 언제 읽으려나 했지만 야금야금 읽다 보니 금방 읽혔다. 아직도 칠레인들의 가슴속에 살아 숨 쉬고 있는 위대한 민중 시인 네루다의 모습보다, 삶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 측은지심 가득한 한 남자의 소박한 에피소드들처럼 느껴져 마치 이웃집 할아버지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칠레에 있으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 중 하나가 바로, 칠레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 역시 사랑에 빠졌을 때였다. 누군가 '가장 사치스러운 독서는, 그 책과 관련된 장소에서 해당 책을 읽는 것'이라 했던가. 적어도 칠레에 있는 순간만큼은 네루다에 대해 최대한 많이 알고 많이 보고 가야겠다 다짐했다)
그러던 찰나에 갑자기 생긴 자유시간에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 숙소 근처 산크리스토발 언덕 아래에 위치한 산티아고 네루다의 집을 가보기로 마음먹었다(비로소 칠레에 있는 네루다의 집 3군데를 다 방문하게 되었다)
칠레의 대표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산티아고에 있는 자신의 집 이름을 ‘라 차스코나’라고 불렀다. ‘헝클어진 머리’라는 뜻인데, 세 번째로 맞이한 아내 마틸데의 머리 모양에서 따왔다고 한다. 산티아고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이 집은 저항시인이자 낭만시인이기도 한 그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 한겨레 [유레카] 라 차스코나 / 백기철 칼럼 중 -
네루다는 꿈이 많은 사람이었다. 사람들을 좋아했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도 혼자 시를 쓰는 것만큼이나 좋아했다. 그의 그런 면모는 집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모든 집에는 맛있는 음식과 술을 마실 수 있는 바가 있었고, 그의 집을 보며 처음으로 공간에 대한 욕심이 생기기도 했다(네루다가 당대에 가장 유명했던 예술가들과 진한 우정을 나눌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입구에서부터 한 척의 배 내부처럼 꾸며졌음을 단박에 느낄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만날 수 있었던 캡틴 바는, 망망대해를 누비는 선장이 꿈이었던 네루다의 어린 시절 꿈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유리창도 선실처럼 동그랗게 만들었고, 벽도 유선형으로 만들어져 마치 비밀의 공간을 생각나게 했다. 네루다는 필시 인생은 항해와 같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배처럼 꾸며진 집에 몸을 싣고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세상 어디론가 떠날 채비를 했으리라.
네루다의 삶은 사랑과 낭만 못지않게 혁명과 슬픔으로 버무려져 있다. 그는 1930년대 스페인 내전 당시 바르셀로나 영사로 있으면서 파시스트의 잔악함을 목격했다. 그 후 귀국해 칠레 공산당에 입당하면서 시인이자 혁명가로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1973년 피노체트가 주도한 쿠데타로 평생 동지였던 아옌데 대통령이 숨지고 열흘이 지난 뒤 암 투병 중이던 그도 생을 마감했다. 젊은 시절 대표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처럼 절망의 노래를 남긴 채 숨져갔다.
쿠데타 직후 숨진 네루다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은 오랜 세월 끊이지 않았다. 네루다가 비록 암 투병 중이었지만 직접 사인은 군부에 의한 독살이란 의혹이 그것이다. 칠레 공산당의 조사 요청을 받은 법원은 최근 그의 주검을 발굴해 부검을 하도록 명령했다. 산티아고 남쪽 해변도시 이슬라 네그라에 묻힌 네루다가 40년 만에 다시 역사 앞에 서는 것이다.
- 한겨레 [유레카] 라 차스코나 / 백기철 칼럼 중 -
네루다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철저하게 민중의 편에 서서 함께 가슴 아파하며 눈물을 흘렸으며, 민중 시를 써서 전 세계에 칠레의 암울한 현실을 알렸다. 총칼보다 더 무서운.. 펜의 끝으로. 그렇게 결국 아스라이 사라졌지만, 칠레의 보통 사람들 가슴속에는 영원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당시의 기득권층과 군부독재 정권은 그의 시신마저 무서워서 숨기기에 급급했다. 그의 죽음 앞에선 승패가 없었다. 그의 존재는 이미 불사신과 같았으므로.
그런 네루다의 곁을 마지막까지 지켰던 마틸다는 용감한 여자였다. 네루다의 마지막 일생을 함께 보내면서, 숱한 정치적 압박과 신변 위협을 받으면서도 네루다와의 우정을 지켰다ㅡ후에도 네루다의 흔적을 지킬 수 있었던 결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이 집은 네루다보다 마틸다의 흔적이 더 많이 남아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있으면 참 좋겠다 생각이 드는 소박한 공간들, 장신구들. 그녀와 함께 꾸민 서머 바가 그런 공간이었다.
또한 다른 집들과는 다르게 네루다의 도서관에는 전 세계에 번역된 자신의 책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한국어 번역책도 당당히 있어 왠지 나도 뿌듯해졌다. 일에 치여 있다 오랜만에 네루다를 직접 만나니, 칠레에 처음 와서 들었던 설렘과 다시 재회하기도 했다. 그런 날을 기념하기 위해 기념품점에서 산 크래프트 일기장에 그때의 감정을 그대로 적어놓곤, 네루다의 자서전을 다시 꺼내 들었다. 이런 멋진 사람이, 어른이, 시인이, 외교관을 영원히 가슴에 지니고 있는 칠 레인들이 사무치게 부러운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