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적 라푼젤의 비애
문득 거울을 보니 머리를 꽤 많이 길렀다.
시간이 언제 이만큼이나 흘렀는지..
결혼을 준비하면서 하염없이 길러온 머리카락 끝이 이제는 가슴까지 내려온다.
그간 자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내내 꾹꾹 참아내며 버텨온 오늘이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의 내 머리는 단발이었다.
(전 남자친구와 헤어진 지 1개월 뒤였으므로. 헤어지고 나면 머리를 자르는 습관이 있다. 이별 후 머리를 자르는 여자의 심리는 단순한 기분전환일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다시는 너와의 허튼 미래를 상상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각오다. 머리카락을 잘라내면 그 사람과의 결혼 따위는 내 인생에서 없어진다. 당연히 재회도. 혹시나 이 사람과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리를 자르지 못했던거니까.)
그렇게 자른 단발이 상큼하니 꽤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단순히 내 생각이었나 보다.
짝꿍은 내게 단발도 좋지만 기르면 더 이쁠 것 같다고 했다.
길러보라는 말이지.
'뭐, 긴 머리도 나쁘지 않으니까. 일단은 어깨정도만 넘겨보자.' 하고 기르던 머리가 어느새 가슴께까지 왔다.
만나는 동안 이 사람과의 결혼이 내 인생에 스며들었기 때문에.
잘 참아냈다.
그동안 얼-마나 잘라내고 싶었는지 모른다.
난 머리숱이 적고, 머리카락이 얇고, 그런데 또 부슬부슬 거리는 곱슬머리를 가졌다.
여름 장마철이면 난리가 날 저주받은 곱슬머리..
굳이 이별이 아니더라도 종종 단발로 잘랐던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여름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난여름은 자르지 못해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부여잡으며 속상한 표정을 짓는 거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당장이라도 단발로 자르고 매직으로 쫙쫙 펴 세련된 여자가 되고 싶었지만,
미용실을 갈 때마다 '결혼 예정'이라고 하면 다 똑같이 하는 말. "참고 기르세요."
그렇지, 길러야지. 그래야 결혼하지.. (체념)
이제는 본식이 얼마 남지 않았다.
본식 웨딩 헤어를 검색하며 여러 가지 레퍼런스를 줍줍하고 있는 나다.
무슨 머리를 해야 좋을까, 고민하다가도 역시 로우번(단정한 승무원 스타일, 신부의 대표 헤어)인가 싶어 머리를 자를 수가 없다.
이런저런 신박한 시도를 좋아하는 나지만 그래도 단발웨딩만큼은 피하고 싶다.
단정하게 틀어 올린 긴 머리가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릴 것을 알기에.
(내 인생에 제일 예뻐야 하는 날이니까 나를 대상으로 하는 모험적인 시도는 피해야 한다.)
하지만 결혼식만 끝나면..!
끝나면 당장 미용실로 달려가 머리를 자를 것이다.
긴 머리는 우리 집 수채구멍을 막히게 하고, 샴푸를 두 번이나 짜게 만들며, 말리는 데에도 시간을 다 잡아먹는 악의 근원(?)이니까!!
줍줍, 결혼식 끝나고 할 만한 예쁜 단발머리 사진도 사진첩에 주워 담는 나다.
한시적 라푼젤로 살고 있습니다만 어쩌면 길러온 머리가 아까워 자르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그치만 그 고민은 그날의 내가 하도록 미뤄두고 오늘만큼은 그 하루를 위해 지금껏 열심히 길러온 나 자신에게 박수를 보내련다. 짝짝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