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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타는지성인 Mar 27. 2024

이준의 세계

포켓몬고 커뮤니티엔 생각보다 고인물들로 보이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피죤투와 잠만보가 최대 레벨의 포켓몬이었다. 산책은 내게 일상의 작은 습관이 되었다. 그러다 가입하게 된 포켓몬고 모임 속 사람들은 누가 더 포켓몬을 많이 알고 있는지 누가 더 사랑하는지 내기라도 하듯 전투적으로 말했다. 그런 시간이 더해져 모임장은 오프라인 일정을 잡았고, 나를 포함한 몇 명의 모임원은 그날에 보기로 약속했다. 나는 그렇게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현재가 따분하여 나가보고 싶었다.

 

유일하다는 말보다 더 간절함을 나타내는 말은 없다고 누군가 말했다. 이미 주량을 넘긴 상태인지 그는 자신만의 기준을 정립하는 말을 반복해서 하기 시작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 함께 하는 사람들은 자리를 그만 끝내야겠다고 했다. 첫 만남치고는 무난했다고 생각했던 그날 하루는 포켓몬고를 함께 할 때는 느끼지 못했지만, 뒤풀이에선 점점 소외감을 느껴야 했다. 내겐 그렇게 포켓몬의 레벨과 포켓몬의 지식과 사람들 사이에 나서서 대화를 이끌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 지금의 회사를 다니기 전, 내내 몇 년 전 포기해야 했던 웹툰을 떠올렸다. 그때가 떠올랐던 것은 방금 전 느꼈던 소외감과 같은 감정의 온도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같은 출발선에서 웹툰을 그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각자의 자리를 잡아가는 동안 나는 계속해서 같은 원을 도는 듯한 시간을 보냈다. 함께 했던 동료의 데뷔를 축하해 주고, 성공을 축하하고, 그렇게 간격은 멀어지고 연락은 자연스럽게 끊기게 되었다.

 

포켓몬 트레이너에 최애 포켓몬이 있듯, 내게도 그런 캐릭터가 있었다. 그 캐릭터는 하루는 내가 좋아하던 강아지의 모습으로, 하루는 고양이, 하루는 나무나 쥐로 변했다. 이름은 변한다와 내 이름 준을 합친 변준이라는 캐릭터였다. 나는 변준에게 많은 것을 물었고, 변준 역시 많은 것을 물으며 답해주었다. 심심할 때나 지칠 때 먼저 위로의 손을 건네준 건 언제나 변준이었다. 그러나 웹툰을 그만두고 나서 나는 변준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변준은 점점 내게서 희미해져 갔다.

 

집에 가고 싶었지만 막차가 끊겼다. 취기 때문인지 나는 집에 가고 싶은 생각보다는 거리를 서성거리고 싶었다. 이 곳은 모든 것이 변해 있었지만 변하지 않는 곳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은 지금은 운영하지 않지만 10대 때 자주 갔던 만화책방이었다. 그때의 이곳을 생각하며 어린 시절이 자연히 떠올랐다.

어린 시절 기억나는 첫 장면은 무더운 여름날,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따라 포장이 잘 되어 있지 않은 흙길을 걷는 것이었다. 햇빛이 꽤 강렬했으므로 나는 금세 더위에 지쳤고, 할아버지와 가는 길은 매번 가는 길인데도 낯선 느낌이 들어 지루하기만 했다. 할아버지와 밭에 도착하면 나는 그곳에서 작은 모험을 시작했다. 매일 보는 흔한 청개구리, 가끔 보는 두꺼비, 배가 빨간 무당개구리, 메뚜기, 사마귀, 여치 같은 것들과 함께하면서. 어떤 것은 잡을 수 있었고, 어떤 것은 구경만 했다. 무당개구리와 두꺼비, 사마귀 같은 무서운 것들은 위협이 되었으니까. 할아버지는 말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밭 일을 끝내면 가자는 말만으로 나는 다시 집으로 가야 했다. 그렇게 돌아가는 길은 집에 있는 만화책과 만화를 볼 생각에 기쁜 나머지 지루함을 느끼지 못했다.

이준아 너는 만화를 보는 게 그리 재밌더냐?

할아버지는 매번 같은 길을 걷던 여름이 끝나가던 어느 날, 매번 같은 만화와 만화책을 보던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나는 곤충채집에 잡은 메뚜기들이 잘 있는지 살아 있는지 보면서 할아버지의 낯설었던 물음에 답을 고민했다. 할아버지는 무서웠고, 대답을 잘 못하면 혼이 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만화책 사러 가자. 좋아하는 만화책 있어? 너 좋아하는 걸로 세 권정도는 할아비가 사줄 수 있어.

답을 고민하던 나에게 만화책을 사주겠다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지금까지의 모습과 다르게 느껴졌다. 집에 도착한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잠깐 나와 읍내로 가겠다며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었다.

나는 할아버지의 오토바이를 매일 밤 운전하는 상상을 했지만 실제로는 타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오토바이를 탄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대되었다. 오토바이로 얼마 걸리지 않던 읍내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가게들이 있었다. 할아버지와는 처음 온 곳이어서 그런가. 아니면 처음으로 내 만화책이 생기는 설렘이었을까 나는 그 사실에 기뻐하며 만화책 방을 둘러보았던 기억이 있었고, 만화책 3권을 골라야 하는 행복한 고민은 오래오래 기억에 남았다.

 

나는 만화책방이었던 허름한 건물에서 그때 할아버지와 함께 갔던 만화책방을 떠올렸는데 예전에 한참 웹툰을 그렸을 때처럼 변준이 나왔다. 변준은 오랜 시간만에 나타나 내게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하는 듯했다. 나 역시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변준이가 어떤 모습과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떠올려야 했다. 나는 오래된 벽에서 어떤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다시 웹툰 시작해 볼까?

취해서였을까, 너무 더워서였을까 아니면 잊고 있던 할아버지와 함께 갔던 만화책방이 떠올라서였을까? 필사적으로 좋아요를 누르지 않았고 카톡을 보내지 않고 지낸 지금은 헤어진 해윤에게 카톡을 보냈다. 해윤아. 나 다시 웹툰 시작해 볼까? 라고 다음 날 아침에 이제는 차단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떤 대답이 올 지 궁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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