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업무분장
있어도 없어도 문제인 잡디스크립션
잡디스크립션 (Job description, 직무기술서)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입사 1년 후 내 첫 번째 인사 고과 시기였다. 잡디스크립션 (이하 잡디.) 에는 해당 포지션의 업무 내용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는데, 쉽게 업무분장표 정도로 이해해도 될 것 같다. 한국에서 근무했던 학교도서관에서는 딱히 업무분장표가 없었기도 했지만, 업무분장이라는 것이 사실 당장 내일도 바뀔 수 있는 것이라 잡디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잡디가 없다 한들 상식적으로 내가 동료 혹은 상사의 일을 내 기본 업무를 제쳐두고 기꺼이 맡아하는 일은 없으니 말이다.
상사는 내 업무 성과평가를 위해 잡디와 함께 업적을 간략히 적어 제출하라고 했다. "잡디스크립션이 뭐야?" 상사의 설명을 듣고 나는 대답했다. "나 그런 거 없는데???" 상사는 놀라며 왜 없냐고 되물었다. '아니, 당신이 준 적이 없으니까 없죠. 저한테 물으시면 어쩌나요?' 관장님을 통해 내 잡디스크립션을 받은 상사는 종이를 뚫어지게 쳐다본 후, 심각한 표정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 내 직책은 Serials, Binding, Cataloging Specialist였다. 직책에서 알 수 있듯 내 업무는 크게 3가지로,
(1) 정기간행물 관리 (40%)
(2) 바인딩(Binding, 장정(裝訂))(10%)
(3) 목록/정리 (혹은 편목) (50%)였는데, 업무의 절반을 차지하는 목록/정리가 문제가 되었다.
내가 근무한 동아시아도서관의 소장 자료는 대부분 한중일 언어로 된 도서로 내가 맡아 담당하는 자료도 한중일 책들이었다. 나는 한중일 언어로 된 정기간행물을 관리했고, 몇 권씩 모아 바인딩을 보냈다. 목록/정리 업무는 조금 달랐는데, 한국도서와 중국도서를 목록하는 일이었다. 이 중에서도 한국 도서의 경우 업무 시간의 10%까지는 오리지널 편목 (original cataloging)을 하고, 나머지 40%는 한국 및 중국도서의 카피편목 (copy cataloging)이었다.
여기서 잠깐 각 해당 업무별 퍼센트를 설명해야겠다. 한국 직장 문화로는 잘 이해가 안 가고, 난 여전히 이 시스템을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다. 잡디스크립션 상 퍼센트는 풀타임 근로 기준 일주일 40시간 중 40%에 해당하는 16시간은 업무 1에, 10%에 해당하는 4시간은 업무 2에, 50%인 나머지 20시간은 업무 3에 쓰라는 얘기다. 잡디스크립션의 업무는 해당 직급에 맞게 배정되어 있고, 상급 직급의 업무는 일정 시간 이상 할애하지 않도록 규정해 두는데, 10% 오리지널 편목이 이에 해당한다.
다시 내 업무 얘기로 돌아가면, 중국인 상사는 내게 중국도서를 맡길 수 없다고 하며, 이렇게 문제 있는 잡디에 사인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 사안을 두고 관장님과 상사 사이에 약간의 논쟁이 있었는데, 결국엔 중국도서 카피편목 업무를 포함한 채로 최종 사인을 했다.
문제는 이때부터였다. 잡디스크립션은 그대로인데 중국인 상사는 절대 안 된다며 나에게 중국책 업무를 주지 않았다. 언어가 다를 뿐 목록규칙은 똑같으니 잡디스크립션대로 중국책 업무 시켜달라. 정 못 미더우면 시험 삼아해 보고 결정하면 어떻겠냐라고 장문의 이메일도 보내봤지만 상사는 단호했다. 내가 중국어를 못하는 한국인이라 업무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게 표면적 이유였지만 백 프로 동의할 수는 없었다. 카피편목은 OCLC에 있는 서지레코드를 가져다 쓰는데, 내 중국인 상사의 관리 및 지도하에 중국학생들이 처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국학생의 지도 및 관리라면 업무 효율은 관리자 역량의 문제이지 언어 능력과는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한중일 정기간행물의 카피편목을 담당하고 있어, 일 년 간 중국 정기간행물의 카피편목을 꽤 했기 때문에 상사의 논리를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또 다른 문제도 있었다. 기존에 한국자료 주문 및 카피편목을 담당하는 한국인 직원이 있어 내 잡디스크립션 상 업무와 겹치는 것이었다. 한국인 직원은 중국인 상사의 분명한 가이드라인과 지시가 있다면 나한테 업무를 넘기겠다고 의사표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인 상사는 한국 카피편목 업무도 조정을 해주지 않았다.
대체 업무를 주지도 않고, 잡디스크립션을 바꿔주지도 않는데, 문제는 이게 내 업무시간에 40%나 되어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이었다. 입사 후 한 차례 대대적으로 한국 정기간행물 구독 취소를 해서 관리해야 할 종이 정기간행물의 수도 적어졌고, 바인딩은 매주 보낼 수 있는 할당량이 정해져 있었다. 자연스레 한국 도서 오리지널 편목과 학생들이 처리하지 못한 카피편목을 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며 꾸준히 잡디 변경을 요청했다.
돌아오는 답변은 매번, 몇 년째 똑같았다. 상사 본인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서 관장님과 논의 중이라는 것이었다. 잡디스크립션이 바뀌지 않아 매해 인사고과 때마다 찝찝했지만,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상사에게 물어도 뾰족한 답변이 없을뿐더러, "nothing we can do"라며 나 몰라라 하는데 내가 무엇을 더 해야 했을까?
다른 사람의 잡디스크립션 내용이 바뀌었다는 걸 몰랐더라면 계속 멍청히 가만히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코로나로 한창 재택근무를 하던 2020년 인사고과를 앞두고였다. 팀 회의에서 상사가 다른 직원들의 잡디스크립션 변경 내용을 안내하는데, 나는 혼란스럽고 불쾌했다. 생각보다 많은 직원들의 업무가 바뀌었다. 자잘한 것부터 굵직한 업무까지. 새로운 업무가 추가되기도 하고, 신입 직원 채용으로 기존 업무가 빠지기도 하는 등 도서관의 프로젝트와 직원 충원에 따라 적절하게 업무 재배정이 이뤄지는 과정에 나는 없었다.
처음으로 망설임 없이 그 자리에서 바로 되물었다. "제 잡디는요? 그간 상황을 봤을 때 제 잡디 변경이 제일 우선순위 아닌가요? 잡디 바꾸기 어려운 거라더니 뭐 이렇게 쉽게 바뀌어요?" 상사는 내 잡디 문제를 잘 알고 있으며, 내년을 목표로 본인이 관장을 푸시하겠다고 했다.
관장을 푸시하겠다던 말은 당시 기분 나빠하는 나를 진정시키기 위한 거짓말이었나 보다. 그다음 해에도 내 잡디는 그대로였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관장과 인사팀 보라고 인사평가서 직원 코멘트 칸에 요청사항을 적었다. "지금 몇 년째 제 업무가 문제가 되고 있고, 불분명한데요. 제 업무 좀 정확히 해주세요!" 코멘트를 적긴 했지만, 제출하기까지 계속 떨렸다. 내가 당사자긴 해도 이런 식으로 스스로 문제제기를 하고 싶지 않았고, 혹시나 부정적인 피드백이 돌아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서였다.
내 인사평가서에 관장님의 최종 서명을 보니 제출하기 전까지 고민했던 내 시간이 아까웠다. 직원 코멘트칸 아래 검토자 코멘트 칸이 텅 비어있었다. 내 요청을 쌩깠다!!! 어이가 없었다. 이게 지금 뭐 하자는 거지? 나는 상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 코멘트와 관련해서 상사에겐 어떤 피드백이 있는지 궁금해서였다. 상사는 아무것도 들은 바가 없다고 했다. 사실 내 코멘트를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도 잘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이건 또 뭔 소린가 싶었다. 내 코멘트를 쌩까도, 내 코멘트를 안 읽어도 관장은 원래 그런 사람이고, 아주 관장다운 행동이라는 상사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나의 공식 요청이 처참히 씹혀 잠깐 시무룩했지만, 이런 결과 얻자고 인사평가서에 코멘트 쓴 거 아니다. 이번엔 꼭 해결해야겠다. 주변에 조언을 구해 인사팀에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직장 내 괴롭힘도 아니고, 연봉 협상도 아니고 업무 분장으로 인사팀에 가는 게 맞나 싶었지만, 같은 잡디로 3년째 문제 해결이 되지 않고 있느니 인사팀의 도움을 얻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