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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도비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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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마크 Mar 10. 2024

첫 출근, 그리고 개기일식

K-도비, 미국 도비가 되다. 

첫 출근과 개기일식이 무슨 상관인가 싶겠지만, 나에게 "첫 출근"의 연관어는 개기일식이다. 최종 합격 통보를 받고 8월 1일 자로 첫 출근을 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회사 측에서 서류처리가 늦어지는 바람에 원래 날짜와 다르게 첫 출근이 미뤄졌다. 변경된 일정 안내를 미리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8월 1일에 출근을 해서야 그날은 일을 시작할 수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당시 회사에서 멀리 살고 있어서 첫날부터 지각하지 않기 위해 새벽부터 서둘러 나왔던 터라 살짝 짜증이 났다. (내 소중한 아침잠!) 더 황당한 것은 서류 처리 기간을 알 수 없으니 상황에 맞게 차후에 출근날짜를 조정하자는 거였다. 이런 일처리는 정말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저 입사 확정은 맞죠...? 다행히도 서류 처리가 잘 마무리되어서 3주 뒤 첫 출근을 했다. 이미 한 차례 출근이 연기되는 바람에 미국에서 취뽀를 했다는 감격도 첫 출근의 기쁨과 설렘도 없이 그저 오늘은 입사 1일 차를 잘 마무리할 수 있길 바라며 도서관으로 향했다. 


인턴십을 통해 모든 직원들을 이미 알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잘 부탁한다며 다시 첫인사를 나누는데 한 명이 안 보였다. 이번엔 직속 상사가 없다! 출근 전 관장님께 직원 몇몇이 휴가 중이라고는 들었지만, 그중 한 명이 내 상사일 줄은 몰랐다. 바뀐 첫 출근날은 8월 21일로, 미국에서 부분 개기일식이 일어나는 날이었다. 흔치 않은 기회라 그런지 당시 내 직속상사는 개기일식을 더 잘 관찰할 수 있는 곳으로 여행(?)을 갔고 그래서 며칠간 휴가를 냈다고 했다. 설상가상으로 그날은 일 년에 하루 있는 도서관 "Clean-up Day"였는데, 이 날은 오전 중에는 도서관 문을 닫고 직원들은 오래된 서류 정리, 책상 및 주변 정리 등 말 그대로 날 잡고 청소하는 날이었다. 새로운 직원 맞이를 위해 이미 잘 정리되어 있던 내 책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깨끗했고 (아무리 청소를 해도 이 날만큼 깨끗해지지가 않는다), 출근 첫날이니 당연히 정리해야 할 오래된 서류도 없었다.


한국의 학교도서관이었다면 보통 학사일정에 맞춰 출근을 조정하기 때문에 이런 황당한 첫날을 겪을 리도 없지만, 설사 직속상사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출근을 못 해 업무 안내를 받지 못하더라도 혼자서 하루를 알차게 보낼 수 있다. 새 해 첫 학기라면 도서관 시스템 내 기존 재학생들 진급 및 신입생 등록으로 바쁘고, 잠깐 짬이 난다면 선임자가 올렸던 전자문서 기안들을 살펴보며 연간 업무와 매월 업무 내용을 대강 파악하며 다음 업무를 기획하고 준비할 수도 있다. 하지만 미국은 모든 업무가 이메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살펴볼 전임자의 전자문서도 없었고, 그나마 선임자가 남겨둔 종이문서가 몇 개 있었는데 그것만 봐서는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차피 직속 상사는 휴가 중이라 질문을 할 수도 없었다. 나는 이용자 서비스팀 소속도 아니었기에 오전 Clean-up Day가 끝나고 오후가 돼도 할 일이 없었고, 나가서 개기일식이라도 구경하고 싶었는데 관찰용 눈 보호안경도 없었다. (하, 뭐가 자꾸 다 없다.)


물론 직속상사가 있어도 신입의 첫날은 크게 바쁘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업무 안내를 듣고 하나하나 배우며 근무시간을 보내는 것과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라 멀뚱히 하루를 보내는 것은 다른데 도대체 왜 직속상사가 없는 날을 첫 출근날짜로 잡았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장 업무에 투입되어 하루빨리 성과를 내야 하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상사의 휴가 일정에 맞게 신입 사원의 출근 날짜를 조정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미국에서의 첫 출근은 계속 알쏭달쏭하기만 했다. 상사가 휴가에서 돌아오려면 이틀은 더 있어야 하는데, 내일은 또 무엇을 하며 하루를 보낼지 막막하기만 했다. 


한국에서 생긴 근로계약서 트라우마가 있어 (K-도비 퇴사기 참조) 답답함과 걱정은 잠시 잊고, HR에 가서 정신 바짝 차리고 각종 서류에 사인을 마쳤다. "근로계약서 사본 수령"이라는 강력한 교훈을 잊지 않고 서류를 살펴보는데, 한국식 근로계약서라고 부를 만한 서류는 없었고 대부분 비자 관련 서류들이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나는 같은 팀 한국인 선생님께 근로계약서 같은 거 없냐고 여쭤봤는데 미국은 그런 거 없다고 하셨다. '미국은 다르구나'라고 생각을 하며 한시름 놓았다. 사인도 잘 마쳤고, 늦게나마 나도 개기일식 관찰용 보호안경을 얻게 되어 잠깐 밖에 나가 개기일식을 보고 왔다. 벽에 비친 태양 그림자가 반짝반짝 엄청 예뻤다. 내 미국 회사생활도 반짝반짝 아름답게 흘러갔으면 좋았을 텐데, 아무것도 모르던 첫 해를 제외하고 현실은 좌절과 분노 그리고 깊은 빡침의 연속이었다. 한국에서 주의 깊게 봐야 할 것이 근로계약서였다면 미국에서는 직무기술서 (Job description, 편의상 업무분장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를 꼼꼼히 봐야 했다. 근로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갑과 을이 한부씩 나눠 갖듯이, 미국에서는 직무기술서에 슈퍼바이저와 내가 서로 사인을 하고 사본을 갖고 있어야 했는데, 그걸 몰랐다.


한참이 지난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내 첫 출근과 관련한 허술한 일처리 과정이 내 중국인 상사와 중국인 관장의 관리자로서 미흡한 모습을 보여주는 힌트가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일 년 가까이 존재조차 몰랐던 업무분장표가 후에 그렇게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게 될지도 몰랐다. K-도비였던 나는 업무분장표의 중요성을 모르고 개기일식의 특별한 추억을 가진 미국 도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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