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셋 F 아줌마의 센티함
동네에 치킨집이 새로 생겼다. 요즘은 상가 건물 하나에도 여러 개의 치킨집이 있을 정도로 흔하지만 이 치킨집은 달랐다. 오픈을 알리는 현수막을 본 순간 가슴이 요동쳤다. 처갓집 양념치킨. 묻어둔 낭만이 꿈틀댔다.
내가 어릴 때, IMF 한참 전이니 10살 전후였을 것이다. 아빠는 가내수공업으로 은수저를 만들어 호텔이나 백화점 등으로 납품했었는데 월 1회 월급처럼 대금을 수금하는 날이면 손에 무언가를 들고 돌아오곤 했다. 어떤 날엔 귤이 잔뜩 들어 있는 검정 봉지, 어떤 날엔 슈퍼에서 파는 하드 한 보따리. 또 어떤 날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군고구마가 아빠의 품에서 선물처럼 튀어나왔다.
아빠가 뭘 사 갖고 올까 기다리는 마음은 봄꽃을 기다리는 것처럼 설렜다. 그중 내가 가장 반기던 건 치킨이었는데 어쩌다 아빠의 손에 처갓집이나 이서방 양념치킨 봉지가 들려 있을 때면 온 세상을 다 얻은 듯 행복했다.
오빠와 서로 더 먹겠다며 싸우는 사이 아빠는 엄마에게 돈 봉투를 건넸다. 바스락거리는 누런 봉투에서 돈을 꺼내 손가락 끝에 침을 묻혀 가며 세던 엄마와 흐뭇하게 보던 아빠의 모습이 아직도 또렷하다.
월급을 현금으로 직접 수령하던 당시엔 그게 큰 기쁨이었다. 계좌로 입금받아 손에 쥐어 보지도 못한 채 카드대금이나 대출 이자, 공과금 등으로 빠져나가는 지금엔 느낄 수 없는 그 시절의 낭만.
"엄마엄마~ 왜 하필 처갓집이야? 시집도 있는데 왜 처갓집만 있지?"
"엄마~ 우리 아빠 이서방인데, 그럼 이서방 양념치킨은 우리 아빠 양념치킨인가~?"
요상한 발상을 하며 맛있게 먹던 처갓집, 이서방 치킨은 내가 어른이 되며 낭만을 잃는 사이 하나 둘 자취를 감췄다.
그러다 얼마 전 동네에 처갓집 양념치킨이 새로 문을 열었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이젠 마음먹으면 언제든 먹을 수 있는 치킨이지만 그 옛날 추억이 떠올라 뭉클했다. 마치 내 낭만의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를 몇 십 년 만에 만난 것 같은 감동이랄까.
"아빠~ 우리 동네에 처갓집 양념치킨이 생겼거든. 옛날에 아빠가 수금날 그거 사 오기도 했잖아..."
오랜만에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재잘재잘 수다를 떨었다.
며칠 전, 볼 일을 보고 돌아가는 길에 수금날의 아빠처럼 처갓집 양념치킨 한 마리를 샀다. 아이들은 나를 반기는 것인지 치킨을 반기는 것인지 평소보다 신바람이 났다. 잃어버렸던 소중한 물건을 우연히 찾은 듯 가슴이 벅차고 코 끝이 찡했다.
나이를 먹으면 이렇게 뜬금없이 옛 추억에 센티해지는 걸까. 아니면, 폭싹 속았수다를 본 탓인가. 마흔셋, F 아줌마의 3월. 유독 그 시절이 떠올라 가슴에 바람이 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