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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Feb 06. 2024

백제 개로왕과 고구려 장수왕

백제는 고구려에 삼국의 주도권을 빼앗긴 것이 너무 속상했어요. 불과 얼마 전까지 고구려와 신라보다 강했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어요. 특히 백제의 제21대 개로왕(재위 455~475)은 고구려에 빼앗긴 영토를 되찾아 오고자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 왕이었어요. 하지만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어 약 78년간 고구려를 경영한 장수왕의 상대가 되지는 못해요. 그 결과 오늘날 개로왕은 고구려 첩자 도림에 속아 한강 유역을 뺏긴 백제 왕으로 알려져 있어요. 


백제 개로왕은 고구려의 첩자에 속을 정도로 아둔하고 무능력한 왕이기만 했을까요? 사실 그렇지 않아요. 개로왕은 아신왕 이후 계속되는 고구려의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어요. 중국 송나라 황제에게 관직을 내려달라고 부탁하는 방식으로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맺어요. 중국이 백제를 지지한다는 것을 고구려에 보여줌으로써 외교적으로 우위에 서려는 전략이었어요. 


대내적으로는 고구려의 강한 군대에 맞서기 위해 백제의 병력을 늘리고 엄청난 훈련을 시켰어요. 고구려와 마주하고 있는 북쪽 쌍현성을 수리하고, 청목령에 큰 목책을 세워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하면서 동시에 고구려를 침략할 교두보로 삼아요. 철저한 준비와 노력 끝에 고구려를 상대할 자신이 생긴 개로왕은 472년 중국 북위에 사신을 보내요. 고구려를 남과 북으로 같이 공격하자고요. 그만큼 개로왕은 고구려를 상대할 자신이 있었던 거예요. 하지만, 고구려의 강대한 힘을 무서워하는 북위는 백제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백제 개로왕이 고구려에 복수를 준비하고 있을 무렵,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어 매우 훌륭하게 나라를 경영한 장수왕(재위 413~491)이 있었어요. 광개토대왕이 짧은 시간에 고구려의 영토를 매우 넓게 확장했다면, 장수왕은 넓어진 영토와 인구를 효과적으로 통치하는 현명한 군주였어요. 장수왕은 영토가 넓어지는 것을 마냥 좋게만 생각하지 않았어요. 다양한 민족과 이질적인 문화가 유입되는 것을 조화롭게 정리하지 못하면, 오히려 국가에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고 봤어요. 즉, 방만한 경영보다는 내실 있는 경영을 중요하게 생각한 왕이었다고 보면 돼요. 


장수왕은 고구려를 가장 위협할 대상이 중국이라 생각했어요. 아무래도 고구려보다 많은 영토와 인구를 가진 중국을 무시할 수가 없었던 거죠. 반면, 백제와 신라는 얼마든지 통제 가능하다고 봤어요. 그래서 중국의 여러 왕조와 군사적 충돌을 벌이기보다는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어요. 반면 백제와 신라는 감히 고구려의 영토를 넘보지 못하도록 군사적으로 강하게 몰아붙였고요. 


국내적으로는 높이 6.34m에 무게가 37톤에 이르는 광개토대왕릉비를 건립해요. 고구려가 하늘의 자손이며, 광개토대왕의 정복 활동을 기록함으로써 고구려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자부심을 심어주었어요. 이것은 당연히 왕과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높여주었죠. 427년에는 넓어진 고구려의 영토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옮겨요. 평양은 옛 고조선과 낙랑이 있었던 장소로 다른 지역보다 뛰어난 선진문물이 많이 남아있었거든요. 또한, 넓은 평야 지대로 곡물이 풍부하고, 많은 사람이 거주하는 장소이기도 했어요. 무엇보다 평양은 교통의 요지였어요. 산으로 둘러싸인 국내성과는 달리 평양성은 서해를 통해 중국과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고, 고구려 모든 지역에 소식을 빠르게 주고받을 수도 있었고요. 이 외에도 고구려의 수도가 평양에 있는 것만으로도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는 데 효과적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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