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이 자라지 않았다는 최영 장군의 묘를 보기 위해 경기도 고양시 대자산으로 향했다. 주차장에는 많은 차와 사람들로 북적여서 주차 공간을 찾기 어려웠다. 최영 장군의 묘를 보려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에 지금까지 찾아오지 않았던 나 자신이 부끄러우면서도 기대감도 높아졌다. 특히 주차장 한편에 세워진 높은 비석에 쓰인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라는 문구는 나의 걸음을 바삐 움직이게 만들었다.
최영 장군 묘소를 알려주는 이정표를 따라 올라가면서 의아함과 불안감이 점점 짙어졌다. 나랑 같이 걷던 사람들이 하나둘 보이지 않았다. 어느 순간 나 혼자 길을 걷고 있었고, 길가에는 최영 장군 묘소로 가는 이정표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주변에는 포장되지 않은 골목길과 80~90년대 지어진 듯 보이는 낡은 집들만이 보였다. 숲길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왼쪽으로 지저분한 밭과 비닐하우스가 보였다. 다행히도 다시 보이는 이정표를 보고 걸음을 내디뎠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사람들로 내가 제대로 가고 있다는 확신은 생기지 않았다.
다행히 어느 정도 걷자 돌계단 아래, 이곳이 최영 장군의 묘소가 맞음을 알려주는 안내판이 보였다.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최영 장군의 묘가 보였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다 아는 최영 장군이기에 묘소가 어느 정도 클 것이라 생각했던 나의 예상과는 달리 아담했다. 그러나 부족함이 없이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었다. 봉분 정면 왼쪽에는 묘비가 있고, 오른쪽에는 무민공충혼비(武愍公忠魂碑)가 세워져 있다. 봉분 앞으로는 문인석과 망주석 각 2기와 상석, 향로석, 혼유석이 있어 격식을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 최영에게 삶의 방향을 가르쳐 준 아버지 최원직 묘가 뒤에 자리하고, 묵묵히 자신을 믿고 뒷바라지한 아내 문화 류씨와 합장되어 있어서 외롭지 않아 보였다. 또한 봉분 위로 따스한 햇살이 비추고 있어 포근함도 있었다.
최영 장군은 고려를 넘어 일본·원나라·명나라 모두가 인정하는 뛰어난 무장이었다. 무엇보다 아버지 최원직이 남긴 유훈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를 평생 가슴속에 새기며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살아간 인물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부정된 행동을 하지 않고, 오로지 백성과 나라만을 위해 살아갈 수 있었다.
최영이 살던 고려 말은 북으로는 홍건적과 몽골이, 남으로는 왜구가 침략하여 하늘의 별만큼이나 죽어가는 고려인이 많았다고 기록되던 시기였다. 아무 잘못 없이 약탈당하고 죽어가는 백성을 안타까워한 최영 장군은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전장으로 달려가 싸웠다. 그 결과 서경을 점령한 4만 명의 홍건적을 내쫓고, 덕흥군을 내세워 1만의 군대로 침략한 원나라 군대를 격퇴하는 등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며 수많은 고려인을 구해냈다.
그중에서도 최영 장군의 가장 유명한 전투는 홍산전투다. 부여와 공주 지역을 침략한 왜구를 고려군이 막아내지 못하자, 최영 장군은 61세의 노구로 출전한다. 많은 사람이 고령이라며 출전을 말렸지만, 최영 장군은 묵묵히 갑옷과 무기를 챙겨 전장으로 나갔다. 승패를 알 수 없는 치열한 전투에서 최영 장군은 입 주변에 활을 맞지만, 스스로 활을 뽑아내고는 전장으로 달려갔다. 이 모습에 사기가 오른 고려군은 왜구를 크게 이길 수 있었다.
최영 장군은 전장에서만 용감무쌍하지 않았다. 조정에 나가 공민왕을 겁박하며 권력을 남용하는 조일신을 제거했고, 신돈의 독주를 막으려 노력했다. 신돈에 의해 유배형을 받았을 때도 조금도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유배지로 떠났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해서도 최영의 고려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원나라를 내쫓은 명나라가 철령 이북을 요구해오자, 요동 정벌을 주장하며 고려의 위상을 보여줘야 한다고 우왕을 설득했다. 이것은 다시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많은 공물을 바치던 시절로 되돌아가지 않으려는 최영의 의지였다.
최영의 요동 정벌을 모두 찬성하지 않았다. 어떤 이는 우왕의 장인으로서 정적을 제거하여 권력을 장악하려 한다고 힐난했다. 어떤 이는 강대한 명나라와 싸운다는 것은 고려를 멸망시키는 일이라고 외쳤다. 최영과 함께 백성들의 영웅이던 이성계도 4불가론을 외치며 요동 정벌을 강하게 반대했다.
수많은 사람이 여러 이유로 요동 정벌을 반대했지만, 최영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지금 철령 이북을 내주면 다음에는 더 큰 것을 내놔야 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요동 정벌군과 함께 출정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우왕이 최영 장군을 자신의 곁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면서 역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억지로 요동 정벌을 떠났던 이성계가 조민수를 설득하여 위화도회군을 감행한 것이었다. 고려의 최정예군으로 이루어졌던 요동 정벌군을 고려 최고의 명장 이성계가 지휘하는 만큼 누구도 막아설 수 없었다. 아무리 최영 장군이라 할지라도 맞서 싸울 군대가 없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결국 이성계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최영 장군은 참수당하고 만다.
이때 최영 장군의 죄명은 “무리하게 요동을 정벌하려 계획하고, 왕의 말을 우습게 여기며 권세를 탐한 죄”였다. 최영은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불명예스럽게 죽은 것은 두려웠다. 그렇기에 자신이 탐욕을 부린 일이 있다면 무덤에 풀이 자랄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누가 봐도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흙에서 풀이 자라지 않는 일은 본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1976년 최영 장군의 묘소를 정비하기 전까지 풀이 자라지 않았다고 한다.
과연 사실일까? 1976년 이전의 모습을 보지 못한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풀이 자라지 않기를 바라는 백성들의 마음이 컸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교통이 발달한 지금도 최영 장군의 묘소를 찾는 사람이 적은데, 조선시대는 어땠을까? 아마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보인다. 조선 건국에 반대한 최영 장군의 묘를 굳이 방문하려던 사람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최영 장군의 후손들만이 찾아오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또는 죽은 최영 장군을 신격화시키며 받드는 무속인들이 찾아왔을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최영 장군이 일반 사람이어서는 안 되었다. 조선에서 강조하는 충절의 상징이 되어야 했고, 자연의 섭리도 바꿔버리는 신이 되어야 했다. 그렇기에 황금을 돌같이 보던 최영 장군의 삶과 무덤에 풀이 나지 않는 현상을 강조했다. 이것은 최영 장군의 후손에게는 명예를 되찾는 일이었으며, 무속인에게는 자신의 영적 능력을 확인시켜주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이성계와 후대 왕들의 포용성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누구보다 최영 장군을 존경하고 따랐던 이성계는 최영 장군을 죽인 것이 늘 마음의 짐이었다. 가는 길이 달라져서 서로를 죽여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그 누구보다 나라와 백성을 사랑했던 최영의 명예를 더럽힌 사실에 죄송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서 조선을 건국하고 기틀이 잡히자, 최영 장군에게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어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다. 고려가 다시 부활하지 못함을 확인한 후대 왕들은 최영을 통해 관료들에게 충절을 요구하였다.
대자산에 있는 최영 장군의 묘소는 크기가 작고, 방문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그러나 어느 국왕보다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최영 장군을 비난하고 부정하는 말이 아닌, 나라와 백성을 위해 살다가 억울하게 죽은 최영 장군을 안타까워하는 말이 많았다. 최영 장군을 길흉화복에 영향을 주는 신으로 믿으며 기도를 올렸다. 분명 역사적으로 이성계가 승자였고, 오늘날에도 최영 장군의 무덤보다 이성계가 누워 있는 건원릉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많은 사람이 찾는다. 하지만 이성계는 신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이성계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위화도회군부터 지금까지 존재한다. 최영 장군 묘를 내려오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누가 진정한 승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