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림사는 충남 부여가 백제의 수도로 영광을 누리던 당시 에는 매우 큰 사찰이었지만, 신라와 당나라의 침략으로 멸망하는 과 정에서 철저히 파괴되었다. 그 후 남아있는 것도 돌보는 이가 없어 시 나브로 사라져갔다. 그래서 1,400여 년이 지난 지금 정림사지 터에는 오층석탑과 석불좌상만이 남아 옛 모습을 전하고 있다. 정림사지 오 층석탑이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도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나라 국보로도 지정된 이 석탑은 아주 오래전부터 평제탑(平濟塔) 으로 불려왔다. 평제탑이라 부른 데에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과 관련 이 깊다. 백제를 쳐들어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백제의 수많은 자원 을 약탈하고 방화를 일삼으며 찬란했던 백제 문화를 한순간에 없애버렸다. 이 과정에서 백제의 상징과도 같았던 정림사지 오층석탑1 층 탑 신 사면에 평제기공문(平濟紀功文)을 새겨놓았다. 정림사에 대한 기록 이 모두 사라지고 소정방이 새겨놓은 평제기공문만 남은 상황에서 우 리는 한동안 소정방이 만든 탑으로 인식하고 평제탑이라 불렀다.
평제기공문이란 백제를 멸망시킨 자신의 공로를 기념한 글로, 소 정방이란 인물이 얼마나 오만하고 기고만장했는지를 알려준다. 타국 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전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런 인물에게 백제 의 찬란했던 600년의 역사가 실전되었다는 사실이 가슴을 아프게 한 다. 그로인해 유일하게 온전한 형태로 남은 백제의 석탑인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중국이 세운 것이라 생각했으니 분통이 터진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중국이 세운 전승탑이라고 생각했기에 신라시대를 넘어 지금까지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기록이 사라져 오랫동안 평제탑이라 불리던 것을 누가 정림사지 오층석탑이라는 것을 밝혀냈을까? 그 주인공은 한국인이 아니라 일 본인 후지사와 가즈오다. 그가 1942년 부여를 방문했을 때 이곳에서 “태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라고 적혀 있는 기와를 발견했다. 중국 연호인 태평팔년은 고려시대 현종19년 을 뜻한다. 백제시절에 불리던 사찰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고려 현종 때 이곳을 정림사로 불렀다는 사실을 밝혀내면 서 오늘날 정림사지라 부르게 되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멀리서 보았을 때는 크게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석탑으로 보인다. 그러나 탑에 가까워질수록 모두들 감탄을 자아내며 한참을 바라보게 된다. 가까이에 서면 카메라에 탑의 전신을 모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탑은 높고 거대하다. 정림사지 오층석탑 을 보고 있으면 미륵사지 석탑처럼 엄청난 위압감과 중압감을 느끼게 된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나름 많은 석탑을 보았지만, 백제의 석탑만 큼 크고 웅장한 기운을 뿜어내는 것을 보지 못했다. 이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답답하기만 하다.
역사적으로도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우리나라 석탑의 계보에서 매우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불교가 전래된 4세기에서 6세기 말까지 주로 목탑이 제작되었다. 불교가 토착 종교화되 는 7세기부터 우리의 자연에 맞추어 목탑보다는 석탑이 주로 만들어 졌다. 이 과정에서 가장 앞서있던 나라가 백제였다. 백제가 석탑을 만 드는 선진 기술을 보유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무영탑(석가탑)의 전 설이 있다. 무영탑의 전설을 살펴보면 김대성이 불국사를 세계 최고 의 사찰을 만들기 위해, 백제 지역의 아사달이라는 석공을 초청해 석 가탑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신라에는 당대 최고의 석탑을 만 들 수 있는 기술자가 없어 백제 기술자인 아사달을 초빙했다는 것은, 백제가 석탑을 만드는데 있어 가장 뛰어난 기술을 확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백제의 앞선 기술을 실제로 증명하는 것이 바로 정림사지 오층석탑이다. 이 탑을 통해 우리는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화되는 과 도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목탑과 석탑은 자재의 무게와 형태가 달라 탑을 만드는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목탑의 특징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석탑으로서 꼭 갖추어야 할 안전성 을 탑 속에 넣어두었다. 참으로 대단하다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백제가 멸망할 때 많은 지배계층과 기술자들이 중국에 끌 려가거나 일본으로 도망갔다. 남아있는 백제의 모든 것은 부정되었 고, 남아있는 백제인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감추어야만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많은 백제의 유물이 버려졌고 파손되면서 백제의 찬란 했던 과거는 사라졌다. 그 결과 오늘날 적은 유물과 기록으로 인해 백제 문화가 신라보다 평가 절하되고 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이 신라 의 석가탑과 비교해도 절대 뒤처지지 않음에도, 상대적으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잊혀 간다는 사실이 아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