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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Sep 10. 2024

남편 못지않은 독립운동가 김숙자

다른 여성 독립운동가처럼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장도빈의 아내였던 김숙자는 평안북도 영변에서 태어났다. 김숙자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투옥 생활을 할 정도로 나라를 사랑한 부친 김준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일까? 김숙자의 동생 김응원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 조직인 연통제의 책임자로 활동하였으며, 조선총독부 대관(大官)을 암살하려 했던 독립운동가였다.






김숙자는 선각자였던 아버지의 도움으로 1912년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고향 숭덕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배움이 너무 재미있던 김숙자는 다시 서울로 상경하여 경성여고보 3학년으로 편입했다. 경성여고보는 1908년 우리나라 최초로 설립된 관립 여학교인 한성고등여학교의 후신으로 집안이 좋거나 능력이 인정되는 여성만이 입학할 수 있는 명문 학교였다.


그러나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이후 경성여고보는 일제에 협력하는 한국인을 양성하려는 목적으로 운영되었다. 대부분의 교사를 일본인으로 채워 운영했지만, 한국 여학생들의 민족의식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3·1운동 당시 300여 명의 전교생 중 42명이 비밀조직에 가담하여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 당시 김숙자는 25살이라는 만학도였지만,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만세운동에 나섰다. 다른 사람이 모두 곤히 잠든 취침 시간에 일어나 300여 장의 태극기를 제작하던 김숙자는 3·1운동이 시작되자 누구보다 빨리 탑골공원으로 가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 시위 확산을 막으려는 일본에 의해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지자 김숙자는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평생을 함께하는 반려자이자, 독립을 위해 심신을 바치기로 약속한 동지이자, 존경하는 인생 선배인 장도빈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 훗날 장도빈과 김숙자의 아들은 “33살이던 아버지와 28살인 어머니가 결혼하게 된 것은 항일 독립운동이라는 공통분모가 작용했다.”라고 회고할 정도로 둘의 만남은 사랑을 초월한 인연이었다.


김숙자는 아이를 갖고서도 독립된 나라를 되찾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여성 비밀 독립운동조직인 대한애국부인회 평북조직책으로 활약하였다. 대한애국부인회는 군자금을 모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내는 일을 하는 만큼 독립운동이 발각되면 매우 큰 고초를 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김숙자에게 독립운동으로 겪는 고초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배 속의 아이조차 독립에 대한 열망을 멈출 수 없었다. 일분일초도 쉬지 않고 군자금을 모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내던 김숙자는 1921년 5월 일본 경찰에 붙잡히고 만다.


당시 매일신보는 [여자 정치범 검거, 독립운동 거괴(居魁) 김숙자 열심히 운동하다가 잡혔다.]라고 제목 아래 기사를 냈다. “경성 누하동에 사는 김숙자가 일찍 상당한 지식도 닦았다. 수년 전 영변군 숭덕학교 교사로 초빙돼 열심히 교육에 정진했다. 평양 선교사와 의논해 조선부인 1만 명 연명서와 취지서 짓기를 맡았다. 거액의 돈을 모집해 평양 선교사 모씨에게 주었던바, 그 선교사는 그간에 또한 정치범으로 검거돼 지금 옥중에서 신음하고 있다. 김숙자는 오히려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자못 암중비약을 계속하다 경찰에 검거됐다.”라는 기사를 보았을 때 김숙자의 독립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 일로 수감생활을 마친 김숙자는 이후 교사로서 민족정신을 가르치는데 성의를 다했다. 더불어 남편이 독립운동을 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며, 아이들이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처럼 김숙자의 남아있는 행적이 많지 않아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여러 뜻있는 분들의 관심과 노력으로 김숙자의 업적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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