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같은 관계 지향적인 사회에선 제 몸 하나 건사하기 팍팍하다. 살아보니 남는 건 불안한 미래뿐이라는 생각이 타인과 어울려도 중심은 '나'라고 외친다. 그럼에도 나보다 상대가 먼저인 행동이 있어 세상은 따뜻하다. 배려도 그중 하나다. ‘누가’ 마음을 쓰느냐가 아닌 ‘누구에게’쓰였는지에 집중해보자. 전자는 행한 사람이, 후자는 받는 사람이 주인공이다. 연인들이 자신보다 상대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처럼 배려도 행위자가 조연일 때 빛난다.
친절이 갑질이 되다.
‘지금 네게 필요한 건 이거야. 내가 잘 알아’
일방적인 호의에 상대는 당황스럽다. 자신이 베푼 배려가 별거 아니니 쑥스러워 말라는 자신감은 또 어떤가. 행한 자와 받는 자 모두 편하면 친절이지만, 받은 사람은 곤욕스럽고 행한 자만 즐거우면 간섭이다.
친절과 간섭의 경계를 넘나드는 행동은 상대의 결여를 제 방식대로 해결하려는 독단에서 나온다. 시작이 어떻든 상대의 형편을 살피지 못해 갑질이 된 친절은 상대의 영역을 무례하게 침범한다. 결국 행복한 갑과 상처받은 을의 관계만 남는다. 친절의 주인인 '갑'의 이면엔 무언가를 베풀었다는 공명심이 있다. 원치 않은 친절이었음을 모르는 사람은 친절한 '갑'뿐이다.
친절 : 다정하고 공손하며 부드러운 태도.
상대를 존중하면 공손해진다. 판단하지 않으니 정중하고 부드러울 수밖에 없다. 사심 없는 배려는 상대를 나보다 낫게 여기는 적극적인 마음에서 나온다. 행한 사람은 잊어도 받은 사람이 친절을 기억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가 해달라 했어?”
친절한 사람 같지만 내 주위 전방 몇 미터에 선을 긋고 거리를 두고 싶은 사람이 있다. 악인이라면 속 편히 욕이라도 할 텐데 생각없는 오지랖과 불편한 친절을 떠안기며 웃으니 난감하다. 자존심 상하지 않도록 말을 돌려 거절해도 눈치가 없어 알아듣지 못한다. 자칫 자신의 마음을 몰라준다며 서운해하거나 억울해할 땐 낭패다. 혼자 좋아서 간섭해놓고 내가 언제 그랬냐며 성을 내는 사람에게 제발 저만큼 떨어지라고 경고하고 싶다.
자기애가 충만한 나르시시스트는 주위 사람을 내 편과 적으로 나눈다. 자기 말에 오케이 하면 내 편이고, 나머진 적이다. 나르시시스트의 친절이 무서운 까닭이다. 그의 친절은 자신이 남보다 우위에 있다는 무의식에서 나오는데, 시간이 지나 상대의 반응이 미지근할 경우친절의 대상자를 평가한다. 이제 불편한 친절의 수혜자는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사람이 된다.
나르시시스트에게 고함
우리 일상에 평범하게 섞여있는 나르시시스트는 일종의 경계성 성격장애자일 수 있다. 자신이중심인 세상에서 가족과 이웃, 사회 누구나 들러리다. 친절에도 엄연히 주인이 있다. 제 맘대로 마음 쓰고, 제 뜻대로 감동하라는 식의 나르시시스트에게 "당신, 선 넘었어요. 너나 잘하세요." 호통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