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바늘로 박힌 아픔.
학교의 점심시간은 떠들썩하다. 종일 교실에서 움츠렸던 아이들이 종소리와 함께 운동장으로 쏟아진다.‘국민(國民) 학교’ 시절보다 작아진 ‘초등학교’ 운동장의 중앙과 축구 골대는 고학년의 차지다. 덩치가 작은 저학년은 운동장 구석이나 구령대에서, 유치원을 벗어난 1, 2학년은 화단에 모인다. 밖에 나오지 않은 나머지 아이는 도서실과 복도가 놀이터다. 논다지만 뛰는 게 전부인 아이를 안전지도라며 붙잡을 때마다 미안하다.
“뛰지 마. 소리 지르지 마”
그럼 아이는 뭘 할 수 있나. 10대의 아이가 조신하게 걷고 말하는 학교를 상상하니 소름 끼친다. 숨바꼭질할 장소를 찾아 주차장을 드나드는 아이의 안전을 위해 울타리와 cctv를 설치하고 출입 통제를 하니 감옥을 만드는 느낌이다. 예나 지금이나 친구와 비밀 얘기를 나눌 아지트와 놀이터가 없는 학교는 차갑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낮에는 개성 없는 건물과 수업, 밤에는 학원에 붙잡힌 아이는 대학을 가도 자유롭지 않다. 학자금과 성적, 막막한 진로의 무게가 젊음을 짓누른다. SNS로 숨통을 터보지만 살아있는 현재는 막막하다. 사회가 달리라고 해서 달렸는데 제자리임을 느끼는 게 오롯이 청춘 탓일까.
10월의 마지막 휴일이 황망하다. 지인에게 별일 없는지 연락하고 뉴스를 보다 채널을 돌렸다. 2014년의 상처가 덧나면서 슬픔이 잔인해진다. 아무렇지 않게 걷던 일상의 거리는 죽음의 공간이 되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학교의 체험학습과 수학여행이 중단되더니 코로나로 다시 멈췄다. 그때의 10대가 지금의 20대이다.‘왜 우리만 이러냐’며 좌절하다 하필 그날, 그곳에 즐기러 갔음을 뭐라 할 수 있을까. 거기를 가지 않았으면 아무 일도 아닌 걸까.
‘거길 왜 갔냐’라는 사람은‘세월호 배가 뒤집힌 걸 어쩌란 말이냐’라고 생각한 사람일지 모른다. 그런 사람도 어릴 적 친구와 장난치다 혼난 경험, 담장을 넘거나 몰래 야자(야간 자율학습)를 빼먹고, 수학여행 날 밤 술을 홀짝이다 들킨 기억이 있다. 의리를 지킨다며 별거 아닌 일에 분을 내던 사춘기나 친구에게 실패한 사랑을 하소연하다 취해서 비틀거린 밤이 있다. 젊기 때문에 가능한 무모함과 열기는 누구에게나 있다.
오늘 무사한 당신은 내일의 안전을 확신하는가. 집에 틀어박혀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 고립을 택하지 않은 이상 청춘과 우리의 일상은 다를 바 없다. 놀고 싶은 건 어른도 마찬가지다. 지역 축제와 행사 때마다 여지없이 막히는 고속도로는 일상의 휴식이 익숙하지 않은 우리의 모습이다. 왜 하필이 아니다. 이태원이란 장소나 핼러윈이라는 축제가 아니라 즐기고 누리는 놀이 문화와 놀이터의 부재가 문제다. 낡은 학교의 건물 사이를 뛰어다니는 아이가 아무렇지 않게 뒹굴고 놀 수 있도록 해야 했다.
국가 애도 기간인데 감정이 치받는다. 이 땅에 억울한 자의 울음이 없게 해 달라는 기도가 거부된 듯해 먹먹하다. 며칠째 신경통이 도져 잠을 설친 건 부모로서 젊은이의 양지를 만들어 주지 못한 죄스러움이다. 시대의 아픔이 바늘이 되어 박힌다.
중년의 어른도 사는 일이 쉽지 않다. 매일 중압감에 눈을 떠 정신 차리자 다짐한다. 그러기에 집단 트라우마에서 젊은 세대가 무력해지지 않고, 기성세대가 비겁해지지 않기를 다시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