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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파파 May 16. 2024

003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황보름 저)

지치고 힘들땐 쉬어가요

나이가 들며 취향의 변화가 생긴 탓일까? 소설책을 고르는 취향이 요즘 부쩍 달라졌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는 소설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비범한 인물들의 서사를 좋아했다. 액션이 화려한 히어로부터, 뛰어난 지능과 지략으로 악을 단죄하는 주인공, 시공간을 넘나드는 과학적 허구의 것까지. 그런 대단한 사람들의 거창한 이야기에 가끔 나 자신을 대입해 보며 희열을 느꼈던 것 같다. 하지만 요즘은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소소한 이야기가 좋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의 비범성의 허구를 다시금 깨달은 것이 그 원인이라면 원인일 수 있겠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어릴 때는 내가 대단한 인물이라 생각했다. 내가 태어나던 날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쳤다고 한다. 갑작스러운 날씨의 변동으로 시작하는 위인들의 탄생 설화 같은 이야기가 그러한 생각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마침 용띠이기도 한 나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스스로에게 비범성을 부여하곤 했다. 내 생일이 잦은 태풍이 오는 여름이라는 사실과 내가 태어나던 1988년 한 해에만 수십만 명의 용띠 아이들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말이다. 현실을 깨닫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직장생활을 하기 전까지는 내가 대단한 인물이 되어 세상을 이롭게 하는 데 일조할 거라 기대했지만, 막상 직장에 들어오니 그냥 남들과 같이 월요일이 몸서리치게 싫은 한 명의 보통사람이다.


끔찍이 출근하기 싫은 날이 있고, 회사를 생각하면 머리가 어질 했던 시기가 있다.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싶었지만 무서운 상사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억지로 침대에서 기어 나왔던 일도 수백 번이다. 평범한 내가 평범한 일을 하면서 이렇게까지 싫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더러 들었다. 이런 직장이라도 얻기 위해 간절히 바라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나 자신을 채찍질했다. 돌이켜 생각하면 번아웃 증후군이었던 것 같다.

뒤에 붙은 증후군이라는 표현 때문에 내 상황이 심각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사실 이 증후군에 대한 정의는 ‘한 가지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극도의 피로를 느끼고 이로 인해 무기력증, 자기혐오, 직무 거부 등에 빠지는 증상’으로 누구든 많든 적든 이러한 증상을 경험해 봤으리라 생각한다.


소설 속 등장인물도 그렇다. 다들 번아웃 증후군과 비슷한 증상을 동반한 채 등장한다. 워커홀릭이었으나 어느 날 문득 심한 우울감에 빠진 주인공 영주는 휴남동에 작은 서점을 연다. 취업난에 지쳐버린 민준이 바리스타로 함께 하고, 남편과의 관계에 환멸을 느끼는 지미는 원두를 제공한다. 계약직을 전전하다 인간에 대한 혐오가 가득 차 버린 정서와 쳇바퀴 굴러가는 듯한 학교생활에 무기력함을 느껴버린 민철은 휴남동 서점의 단골 고객이다.


흔히 평범한 사람이라 하면 모두 유사한 삶을 살고, 비슷한 정도의 고난을 경험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평범이란 유사성의 개념이 아닌, 비범하지 않음을 나타내는 데 더 적합한 표현일 것이다. 등장인물 모두 평범하고 주위에 있을 법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면면에는 저마다의 상처와 아픔, 즐거움과 기쁨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한 사람들이 휴(休)남동 서점으로 모인다. 그들에게 이 서점은 지난 상처를 치료해 주는 치료소이자, 앞으로 나갈 힘을 채워주는 보급소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이렇게 풍요로운 시기 배곯지 않는데 무엇이 그렇게 힘드냐고. 그러나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라는 격언은 단순히 물질로 채울 수 없는 인간의 욕구가 있음을 시사한다. 인간은 생리적 욕구를 넘어 안전, 사랑, 존경, 자아실현으로 상위의 것을 좇는 욕구 지향적 존재이다. 단순히 하위의 욕구 충족으로 그치지 않는 향상심은 저마다 다른 지점에서 좌절을 맛보게 한다. '너는 부모 잘 만나서 호의호식하는데 머가 그리 불만이니', '넌 번듯한 직장에 들어갔는데 머가 힘들다는 거야?' 등등 우리는 때로 남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들의 기준에만 맞춰 남을 평가하고 폄훼하는 몰이해적 태도 때문이다.


그러나 휴남동 서점은 가지각색의 아픔을 모두 품어주며 위로해 준다. 때로는 독서가, 때로는 한잔 커피의 향기가, 또 때로는 명상이, 이도 아니면 사람들과의 소통이.

소설을 읽는 시간 동안 나 역시 휴남동 서점에 함께 하였다. 영주가 소개해 준 책을 읽기도 하고, 민준이 내려주는 커피를 마시며 향을 즐기기도 했다. 정서의 명상처럼 멍하니 한 템포 쉬어가기도 하고, 시시콜콜한 얘기를 들으며, 무기력증으로 점철된 나의 마음을 조금은 추스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을 돌아볼 여력이 없는 바쁜 현대인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눈앞의 장애물들을 피하고 넘어가는 것에 급급하여, 지나온 길 자신이 무엇을 흘리고 왔는지 알지 못한다. 흘리고 온 그것이 결승 관문을 통과할 수 있는 열쇠인지, 그 길로 인도하는 지도인지 돌아보지 않은 채 그저 앞으로 달려가기만 한다. 그러다 문득 힘이 풀려 주저앉은 사람들에게 다시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으로 이 책을 꼭 추천해 주고 싶다.


마지막으로 작중 영주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인용하여 행복과 행복감에 대해 말하는 장면을 언급하고 싶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리자면, 행복은 자신의 큰 목표, 꿈을 이루는 것이고, 행복감은 지치고 피곤한 순간 이를 해소하며 느끼는 기분, 예를 들어 고된 노동 뒤 마시는 맥주가 주는 청량감으로 비유할 수 있다. 전자의 행복이란 열심히 노력하여 쟁취해야 하는 것으로, 그 과정이 고되고 힘들어서 그 행복이란 것에 인생을 저당 잡혀 생의 마지막에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주인공의 반론과 자신은 행복보다 행복감을 추구하며 서점을 운영하는 현재가 더 행복하다는 그녀의 말이 가슴에 와닿는다.


나는 수많은 세잎클로바를 밟고 나서 쟁취한 네잎클로바보다 지나가는 발걸음에 조우하는 세잎클로바가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소한 것에서 행복할 수 있는 것이 평범한 사람들만의 특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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